자율주행차 사망사고는
첨단기술의 진보 과정에
인간의 생명이 희생된 비극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는
미래사회가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기술에 종속된 채
소외감·무기력증 빠질 수도
[ 양준영 기자 ]
우리는 결국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알고 있었다. 49세의 엘레인 허츠버그는 지난 18일 밤 애리조나주 템피의 한 도로에서 자전거를 끌고 길을 건너던 중이었다. 그녀는 자율주행차에 의해 사망한 최초의 보행자가 됐다. 시속 38마일로 달리던 우버의 자율주행 볼보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은 브레이크를 작동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자율주행차가 인간 운전자보다 더 안전할 것이다. 비극적인 죽음은 계속 존재하겠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적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위안을 삼으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봇자동차에 치여 죽을 가능성에 대해선 매우 고통스러운 점이 있다.
필자는 다른 차와의 치명적 충돌 사고에 연루된 운전자 한 명을 알고 있다. 사망한 여성은 그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여성은 밤에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 보험회사는 그녀에게 과실이 있다고 판정했다. 하지만 사고는 그를 심하게 흔들어 놓았다. 몇 달 동안 그는 잠을 잘 수 없었고, 더 오랜 기간 말할 수 없었다.
무고한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 모두가 느껴야 할 정신적 충격이 바로 이것이다. 왜 그런지 실리콘밸리 기업의 홍보부서에서 애도의 편지를 받을 가능성은 다소 희박하다. 모든 사람이 친절하고, 사려 깊고, 관심을 기울여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과 함께라면 우리가 변화하거나 뭔가를 느낄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적어도 조금은 낙담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위안이 있다.
저녁 파티에 온 여러 친구들은 자율주행차는 반대하지 말아야 할 ‘미래’라고 진지하게 충고했다. 어렸을 적에 메릴랜드주 과학센터에서 해설사가 “언젠가 태양이 다 타버릴 것”이라고 말한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로봇들로 가득한 미래를 받아들여야 한다.
애리조나, 피츠버그, 그리고 토론토 거리는 이미 ‘(기술)진보’로 가득하다. 캘리포니아인들이여 분발하라. 우리 주에서는 현재 50개 회사에 진정한 자율주행차를 시험할 수 있는 허가를 내줬다. 비상 상황에 원격으로 차량을 작동할 수 있는 경우 운전석에 사람이 앉아 있을 필요가 없는 단계다. 만약 ‘그랜드테프트오토(GTA)’ 게임에서 벗어난 20대 게이머가 여러분의 미니밴을 원격 운전한다는 생각에 불안감을 느낀다면 미래는 여러분의 것이 아니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자동차에 핸들이나 페달이 사라지게 될 날을 준비하고 있다.
어쩌면 해킹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악의에 찬 프로그래머가 자동차 100대를 보내 체서피크 베이브리지의 난간을 뛰어넘게 하거나, 스쿨킬 고속도로에서 고속으로 충돌하게 할 가능성, 정지 표지판에 있는 스티커들이 로봇차량을 속도제한 표지로 착각해 경주를 펼치거나, 일상적인 세차가 카메라를 망가뜨릴 가능성, 무인자동차 앞에서 강도들이 예의 바르게 차를 멈춰 세운 뒤 당신을 길 위에서 납치할 가능성 말이다.
메리 커밍스 듀크대 로봇공학과 교수는 최근 CNBC에서 이들 차량의 인식 체계에는 여전히 ‘심각한 결함’이 있으며, 공공 도로에서 주행은 안전하지 않다고 경고했다. 그는 “만약 (자율주행 시험 중인) 기업들이 정직하다면 컴퓨터 비전, 센서 융합, 그들이 수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세계적 모델 구축 등에서 큰 결함이 있다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에는 기술 천재들이 자율주행 자동차를 매우 안전하게 만들 것이며, 로봇이 우리보다 운전을 더 잘하는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살인자처럼 보일 수 있는, 인간 운전자의 운전을 금지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로봇들에 휘둘리게 될 것이다.
수많은 택시 기사들과 우버 기사들이 사라질 것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민자이거나 한부모,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가벼운 대화나 새로운 도시에서의 첫인사는 우리를 잠깐 돌아봐 주는 운전자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무인자동차가 도로를 지배할 때면 우리는 아마도 매우 다른 미국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는 더 불안하고, 덜 친근한 것이다. 왜냐하면 친근감은 상호의존적인 세상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연마해온 적응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를 덜 필요로 할수록, 상호작용을 덜 할수록, 우리는 서로를 돌보거나 용서하거나, 배려해야 할 이유가 더 적어진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거의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최악은 아니다. 구성원들의 생명을 인간의 판단과 노력보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로봇의 올바른 작동에 맡기는 사회는 확실히 매우 다른 사회다. 커밍스 교수가 말했듯이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우리가 선출한 의원들의 열렬한 후원 아래 대중을 실험용 동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허츠버그에게는 실험에 참여하지 않을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왜 그래야 했을까. 이 ‘멋진 신세계’에서 우리의 삶은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의 죽음은 단지 진보의 대가에 불과하다.
원제=Our Future Is Safer, but Terrifying
정리=양준영 기자 tetriu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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