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투자가 사안마다 '칼자루'
의결권 자문사 존재감 커져
대주주가 좌우하던 과거와 대비
ISS·서스틴베스트 등 국내 5곳 경쟁
주총 이슈마다 찬반 갈리기도
[ 이정흔 기자 ]
지난 16일 KT&G 주주총회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백복인 KT&G 사장의 연임 건을 두고 찬성표와 반대표가 확연하게 갈렸기 때문이다. 2대 주주인 기업은행이 백 사장의 분식회계 의혹 등을 이유로 ‘반대’ 의사를 밝힌 상황에서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는 백 사장 재임 기간의 빠른 실적 개선을 근거로 ‘연임 찬성’을 권고했다.
결과는 백 사장의 연임 성공이었다. KT&G 지분 53.18%를 보유하고 있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백 사장의 연임에 손을 들어준 것이 결정적이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국내 기업의 개별적인 사정을 일일이 파악하기 힘든 만큼 ISS와 같은 의결권 자문사들의 권고안에 의존할 때가 많다. ISS의 ‘연임 찬성’ 권고안이 이번 주총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국내 기업들의 주총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상정되는 안건 대부분이 대주주 측 입김에 좌우되던 예전과 달리 최근에는 주주들이 실질적으로 현안마다 칼자루를 쥐는 곳이 늘고 있다. 주주들의 한 표 한 표가 중요해진 상황에서 시장의 시선은 자연스레 ISS와 같은 ‘의결권 자문사(proxy advisory firm)’에 쏠리고 있다.
의결권 자문사는 주요 기업의 주총 안건을 분석한 뒤 기관투자가에 찬성 또는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민간 회사를 말한다. 다만 이들의 의견은 어디까지나 ‘조언’이다. 기관투자가들이 이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총 시즌과 맞물려 의결권 자문사의 입김이 커지고 있는 데는 최근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과 관련이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가의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을 말한다. 연기금·보험사·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가는 고객의 돈을 관리하는 대리인으로 투자한 기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고 주주 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활동 중인 의결권 자문사는 다섯 곳 정도다. ISS는 사모펀드(PEF)인 베스타 캐피털 파트너스가 소유하고 있는 외국계 의결권 자문사다.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 중 시장 점유율 60%로 압도적 1위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은 2002년 설립된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를 확대·개편한 비영리 사단법인이다. 2006년 설립된 민간 의결권 자문회사인 서스틴베스트는 ‘사회책임투자’라는 큰 틀 아래 국내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평가와 투자전략 컨설팅 등을 제공하고 있다. 가장 최근인 2014년부터 의안 분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대신지배구조연구소는 대신금융그룹의 대신경제연구소 산하에 있다. 2001년 설립된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참여연대 출신 전문가들이 주축이 된 단체다.
이처럼 의결권 자문사마다 태생에 따른 다른 성향이 두드러지다 보니 같은 현안을 두고 종종 결론이 갈리기도 한다. 지난 23일 열린 하나금융지주의 주총 전부터 김정태 회장의 연임을 놓고 의결권 자문사를 중심으로 ‘장외 전쟁’이 치열했다. 서스틴베스트와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등 국내 의결권 자문사들은 ‘반대’를 권고했다. 반면 ISS는 김 회장 연임에 ‘찬성’ 의견을 던졌다.
현재 국내 의결권 자문 시장의 규모는 연 10억~20억원 수준으로 파악된다. 이제 막 시장이 형성되는 초기 단계다. 최근 의결권 자문사들이 비교적 강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의 본격화를 앞두고 ‘시장 선점’을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이 제기되는 이유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외국인 투자자를 포함해 기관투자가들이 주로 투자하는 국내 상장사는 코스피200, KRX300 등 200~300개 기업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며 “앞으로 의결권 자문사 간 경쟁이 더 치열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흔 한경비즈니스 기자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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