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품, 어떤 역할 어울릴지
예측불가능한 얼굴,
덕분에 틈새시장 노릴 수 있었죠
[ 현지민 기자 ] “솔직히 제가 아직 많은 사람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배우는 아니잖아요? 이제 막 저를 알아보고 관심을 가져주기 시작했죠. 그래서 그런지 인기에 대한 욕심은 없습니다. 길 가다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면 제가 깜짝 놀라요.”
다음달 5일 개봉하는 영화 ‘바람 바람 바람’에 출연한 배우 이엘(36·사진)은 이렇게 말했다. 2009년 MBC 드라마 ‘잘했군 잘했어’로 데뷔한 그는 오랜 무명 시절을 지나 영화 ‘황해’(2010)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주영 역을 맡아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덕분이다. 이후 영화 ‘내부자들’(2015), 드라마 ‘도깨비’(2016) ‘화유기’(2017) 등 화제작에 잇따라 출연해 특유의 섹시한 이미지로 사랑을 받았다.
‘바람 바람 바람’은 그의 첫 스크린 주연작이다. 바람둥이 석근(이성민)과 뒤늦게 바람이 난 그의 매제 봉수(신하균), 봉수의 아내 미영(송지효) 앞에 제니(이엘)가 나타나면서 관계가 꼬이게 된다. 제니가 석근과 친구가 되고 아내가 있는 봉수를 유혹하는 모습은 비도덕적이다. 하지만 이엘은 제니의 행동보다는 그의 감정에 집중한 연기로 설득력을 높인다.
“단지 섹시한 캐릭터가 아니라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습니다. 최근에 했던 연기 톤 때문에 섹슈얼한 말투가 배어 있더라고요. 담백하게 연기하려고 노력했는데 꽤 어려웠습니다.”
이엘은 미묘한 차이로도 전혀 다른 성향의 인물이 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병헌 감독의 지시를 많이 받았고 한 장면을 여러 번 촬영하기도 했다.
고교 시절 낯가림이 심했던 이엘은 학교생활에서 재미를 찾지 못했다. 자퇴 후 검정고시를 봤다. 돌아보면 잘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학창시절에 꿈이 없었는데 학교를 그만둔 뒤 자연스럽게 연기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연기 학원에 다녔고 지금까지 활동하게 됐어요. 의미 없이 학교생활을 지속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겠죠.”
이엘은 여러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도 쉬지는 않았다. 무명 시절은 꽤 길었다. 주머니에 남은 돈 300원으로 율무차를 사 배고픔을 달랬던 사연은 아직도 온라인에서 회자할 정도다. 지금의 개성 있는 미모도 당시엔 주목받지 못했다.
“제 외모는 단점이었어요. 어떤 작품에 어떤 역할로 어울릴지 모르는 얼굴이잖아요. 하하. 덕분에 틈새시장을 노릴 수 있었죠. 중성도 아닌 무성의 느낌을 냈으니까요. 트랜스젠더 역할을 두 번이나 하면서 재미를 느꼈습니다. 삼신할머니, 요괴 등 특이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도 됐죠. 지금은 외모가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서른일곱. 연애와 결혼에 대해 묻자 “지금은 독신주의자”라면서 결혼 대신 예술에 대한 갈증이 있다고 했다. 이엘은 지난 25일 연극 ‘아마데우스’ 무대에서 첫 공연도 했다. 연습하느라 목소리가 갈라진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아마데우스’에 ‘욕구는 주셨는데 재능은 안 주셨다’는 대사가 있는데 딱 내 얘기”라며 깔깔 웃었다.
“연기 외적으로 저를 표현해보고 싶은데 실력이 부족해요. 그림도 그리고 싶고 글도 쓰고 싶고 악기도 다뤄보고 싶어요. 요즘은 춤도 추고 싶어요. 도전하는 데 늦은 시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지민 한경텐아시아 기자 hhyun418@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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