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낡은 한옥, 그리고 돌담 옆 영국풍 양옥… 거장의 숨결 느껴보는 '소확행'

입력 2018-04-01 14:50  

드라마 속 그 곳 (2)

'시카고 타자기' '떼루아' 촬영지 용인시 장욱진 가옥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의미하는 ‘소확행’이 사회적 트렌드가 되고 있다. 소확행은 일상 가까이에 존재한다. 단잠을 깨우는 커피 향기,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상, 가로수에 움트는 여린 새순의 기운 등 흔히 지나쳐온 순간이 큰 행복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이 소확행이다. 2008년 화제가 된 드라마 ‘떼루아’의 주된 촬영지였던 경기 용인시 ‘장욱진 가옥’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만끽하고 싶은 소박한 여행자들의 천국이다.

빌라촌 사이의 비원(秘苑) ‘장욱진 가옥’

분당선 구성역 3번 출구로 나와 26번, 26-2번 마을버스를 타고 ‘구교동, 장욱진 고택’ 앞에 내려 길 건너 빌라가 늘어선 골목으로 쭈욱 들어가다 보면 한옥의 소박한 솟을대문과 만난다. 돌담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장욱진 고택(故宅)’이라 새겨진 벽돌 안마당과 연결된다. 한국 추상 회화의 거장 장욱진(1917~1990)이 기거하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 장욱진 가옥(정식 명칭, 등록문화재 404호)이다.


입구에 들어서 처음 마주하는 한옥은 찻집 ‘전가헌’. 본격적으로 가옥을 둘러보기 전 한숨 돌리고자 하면 대추차와 함께 첫 번째 소확행을 맛보길 권한다. 직접 담근 차의 풍미는 계절에 상관없이 여행자의 들뜬 마음을 푸근히 감싼다.

반질반질 손질된 마루에 앉아 장욱진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두 번째 소확행. 아이가 그린 듯 단순한 세상은 지금 봐도 세련되며 따스하다. 한국화 같기도 하고 서양 동화책 삽화 같기도 한 장욱진의 화풍은 동서양을 넘나드는 풍자와 유머, 동심의 발현 같다. “나는 단순하다”며 평생 격식보다 소탈함에 가치를 두고 살아온 화가의 인생철학이 배어 있어서다.

소확행이 대세인 2018년 더욱 와 닿는 장욱진의 작품세계는 그의 가옥에 촘촘히 새겨져 있다. 120여 년 된 한옥은 말년의 그가 왕성한 창작활동의 근거지로 삼은 공간이다. 사랑채와 안채, 광으로 이어진 ㅁ자형으로 장욱진 생존 당시 더욱 충만했던 안팎의 자연을 모두 담아냈다. 거창한 격식은 없지만 사계절을 오롯이 담아내던 한옥의 진정성은 안채 뒤 정자의 도자기 풍경 소리와 함께 시간의 흐름도 멈추게 한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와인 레스토랑 ‘떼루아’

장욱진 가옥의 특별함은 사랑채 돌담 옆 계단을 올라 드러나는 2층 양옥에서 절정을 이룬다. 화가 장욱진의 1953년 작품 ‘자동차가 있는 풍경’ 속 집을 현실로 끌어내어 1989년 초 완공한 이 영국풍 집은 20세기든 21세기든 어디에 둬도 어색하지 않다. 계단을 올라 만나는 현관과 덧문이 달린 2층 창문들은 그림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 재미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편리한 생활을 위한 삶의 지혜가 묻어난다. 본질에 충실한 소박한 장욱진 화가의 가치관이 그림에서 현실로 발현된 것이다.

신구의 화합, 전통주와 서양 와인의 어우러짐을 소재로 한 드라마 ‘떼루아’(2008, 연출 김영민, 극본 황성구) 제작진이 주 무대로 장욱진 가옥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이런 시공간을 초월한 동시성에 있지 않을까?

떼루아는 ‘풍토’라는 의미의 프랑스어다. 서양 와인의 주재료인 포도가 자라는 토양, 기후, 재배법 등 상호작용하는 환경 전반을 의미하는데 이는 한국적 와인의 주재료인 감, 머루, 사과 등이 자라는 풍토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전통주 장인의 손녀 이우주(한혜진 분)가 와인 전문가 강태민(김주혁 분)을 만나 와인을 알게 되면서 한국적 와인 제조의 꿈을 키운다는 줄거리는 장욱진 가옥을 통해 빛을 발한다. ‘남초’라는 전통주점으로 드라마 속에서 첫선을 보인 장욱진 가옥은 4회부터 떼루아라는 와인 레스토랑으로 변신한다. 소박하고 정겨운 한옥 사랑채와 안채 마당을 잇는 유리집 세트가 추가되면서 전통과 현대의 느낌을 겸비한 새로운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극 중 전통주 장인 이무강(전성환 분)이 빚 때문에 남초를 잃은 모양새지만 강태민은 이무강의 부탁으로 전통주점의 직원들을 흡수한다. 한식 요리사와 전통주 전문가는 생존을 위해 와인레스토랑 계약직으로 합류하나 물에 기름처럼 떠돈다. 추구하는 바도, 자라온 환경도 다르니 당연하다.

시간이 흐르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한식 요리사와 프랑스 요리사, 전통주 장인과 와인 전문가는 화합하며 레스토랑에 방문하는 이들에게 행복을 전하겠다는 본질에 집중한다. 프랑스 요리에 한식의 레시피를 더하고 서양 와인에 국산 전통주의 정신을 가미해 떼루아만의 특별함으로 키워나간다.

와인과 요리의 궁합을 의미하는 마리아주는 서양 와인과 프랑스 요리에만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거창한 격식보다는 본질을 꿰뚫는 심플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배경이 돼주는 장욱진 가옥과 빼닮았다.

가족 나들이 장소로 일품… 외국인에게도 인기

와인에 대한 자기만의 세계관과 격식에 빠져 있던 강태민은 이우주를 통해 고가의 최고급 와인보다는 소박한 차 한잔이 주는 매력을 알게 된다. 드라마에서 이우주는 말한다. “사랑은 와인과 닮았다. 1만원도 안 되는 와인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와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당신의 잘남과 못남을 떠나 세상에서 누군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그 사랑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올 것이다. 그런 순간이 오면 그 사람과 함께 와인을 마셔보라.”

거품과 격식을 뺀 본질의 소중함에 대한 메시지는 화가 장욱진의 심플한 삶과 작품 세계와도 일맥상통한다. 장욱진 가옥은 독특한 풍광과 분위기로 드라마 ‘공항 가는 길’(2016) ‘시카고 타자기’(2017) 등의 촬영지로도 사랑받았다. 이들 드라마가 일본 등 아시아 전역으로 알려지면서 소박하고 심플한 장욱진 가옥은 외국인 사이에서도 인기다.

장욱진 가옥에서 당당한 사랑채를 지나 푹신한 잔디를 밟으며 정겨운 장독대 앞을 돌아 언덕 위 양옥 앞 탁 트인 마당까지 일습하다 보면 어느덧 시장하다. 다시 주차장 앞 찻집에 들러 차 한잔을 해도 좋지만 10분만 걸어 큰길로 나가 동네 맛집 ‘지지미’에서 칼국수에 빈대떡을 곁들이는 것도 좋다. 평범한 상가 안 밥집이지만 오랫동안 동네에서 사랑받아온 덕에 단골이 꽤 많다. 지인들과 함께한다면 막걸리는 덤이다.

가족과 아이를 동반한 나들이를 한다면 멀리서도 찾아온다는 인근 카페와 레스토랑을 들러보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지지미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의 ‘카페테이너’는 달콤한 치즈케이크와 아메리카노를 놓고 수다 떨기 좋은 공간. 장욱진 가옥에서 맛본 소박한 정취의 여운에서 벗어나 특별한 인테리어를 경험하며 식사도 하고 싶다면 차로 좀 더 이동해 숲속에 자리한 ‘여시관(如視觀)’도 가볼 만하다. 있는 그대로를 보라는 카페 이름처럼 숲속 풍광을 만끽하며 피자와 파스타를 즐길 수 있다.

국내 최초 와인 드라마로 알려진 ‘떼루아’는 알고 보면 소박한 행복에 대한 얘기다. 화려한 서양 와인과 프랑스 요리가 대거 등장해 눈을 즐겁게 하지만 정작 가슴을 울리는 것은 소박한 국산 와인의 태동과 전통 한국 요리에 대한 재해석이다. 속이 불편한 은행장에게 와인에 곁들일 음식으로 권한 것이 겨울 동치미와 기름을 뺀 치킨이라는 것만 봐도 이 드라마의 특별함이 느껴진다.

명성황후가 고종황제와 함께 마셨다는 와인에 어울리는 음식을 재현하라는 드라마 속 경연도 같은 맥락이다. 주인공 이우주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와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와인이라고 시종일관 주장한다, 역사적 비극 속 황제와 황후의 애틋한 만남은 단지 한잔의 물만 놓였어도 행복했을 것이라는 해석은 경연의 최종 우승으로 다가온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고 단순함이라는 의미이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 darkblue888@naver.com

가볼 만한 곳

장욱진 미술 문화재단/장욱진 가옥/장욱진 고택

주소 : 경기 용인시 기흥구 마북로 119-8
입장료: 2000원
개장시간 : 화~일요일 오전 11시~오후 5시, 월요일 휴관, 주차 가능

지지미

주소 : 용인시 기흥구 마북로 135
주 메뉴 : 해물 수제비 6000원/팥 칼국수 8000원/빈대떡 1만2000원

카페테이너

주소 : 용인시 기흥구 마북로 170
개장시간 : 오전 10시~오후 11시, 주차 가능
주 메뉴 : 아메리카노 4300원/치즈케이크 8000원

여시관

주소 : 경기 용인시 기흥구 마북로247번길 28
개장시간 : 오전 11시~오후 9시, 브레이크 타임 4시~5시(주말, 공휴일 제외), 주차 가능
주 메뉴 : 고르곤졸라 피자 2만3000원/파스타류 2만원대/리코타치즈 샐러드 1만8000원/청포도 레몬주스 8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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