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급진 개혁은 느닷없이 깊이 째는 수술만큼 위험하다

입력 2018-04-05 18:39  

보수의 정신

러셀 커크 지음 / 이재학 옮김
지식노마드 / 856쪽│3만6000원



[ 서화동 기자 ]
1953년 5월 30대 초반의 미시간주립대 강사가 쓴 책 한 권이 미국 지성계를 뒤흔들었다. 뉴욕타임스는 신문 한 면의 절반 크기로 서평을 실었고, 시사주간지 타임은 서평란 전체를 할애해 분석하고 뉴스 기사로도 다뤘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 워싱턴포스트, 경제잡지 포천 등 수많은 매체가 앞다퉈 책을 소개했다. 이 책의 출간 이후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학자와 지식인들의 책이 속속 등장했고, 보수적 성향의 주간지와 계간지가 창간됐다. 대학에는 보수적인 토론 동아리들이 결성됐다.

프랑스혁명 이후 150년 이상 보수주의가 패퇴를 거듭하고 진보자유주의가 팽배했던 당시 미국에서 보수주의를 새롭게 인식하고 일으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 이 책은 정치이론가이자 사회비평가였던 러셀 커크(1918~1994)가 쓴 《보수의 정신(The Conservative Mind)》이다.

출간 당시는 물론 지금도 미국에서 보수주의 사상사를 다룬 가장 중요한 책으로 평가받는 이 책이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권에서도 처음 나온 번역서다. 책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간 번역되지 않았던 것은 초판본 원고량이 17만5000단어나 될 정도로 방대한 데다 책에 인용된 수많은 인명과 저서, 정치·종교·철학·문학을 넘나드는 저자의 해박함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버크에서 엘리엇까지’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러셀 커크는 이 책에서 영국과 미국의 정치·종교·철학·문학에 나타난 보수주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계보를 세웠다. 보수주의의 시조로 평가받는 영국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1729~1797)부터 미국 보수주의의 원조 존 애덤스, 알렉산더 해밀턴, 존 칼훈, 벤저민 디즈레일리, 아서 밸푸어, 월터 스콧, 알렉시스 드 토크빌, 너새니얼 호손, 로버트 프로스트, T S 엘리엇까지 망라한다.

저자는 “근대적 의미의 의식적인 보수주의는 1790년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을 출간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며 그를 보수주의의 시조로 옹립한다. 버크는 그 책에서 18세기 계몽시대 지식인들의 합리주의, 루소와 그 제자들의 낭만적 감상주의, 초창기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 등에 담긴 급진주의 사상을 비판했다. 특히 프랑스혁명에 대해서는 당대의 대표적 지성이었던 제임스 콜필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정 이 일은 역설적이고 기이하다. 그 정신은 찬양하지 않을 수 없지만 파리 사람들의 낡아빠진 폭력성이 충격적인 방식으로 표출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사회발전을 위한 개혁이 사회 그 자체를 태워버리는 대화재가 될 수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책에는 다양성이라는 미덕 아래 획일화된 평범함이라는 ‘악’을 품은 민주주의의 모순을 읽어낸 토크빌, 추상적 자유는 방종이라며 법 앞에서의 규범적 자유를 옹호한 존 애덤스 등 진보자유주의가 초래할 위험과 폐해를 경고한 보수주의자들의 통찰이 가득하다. 스코트와 캐닝, 콜리지 등 벤담의 공리주의에 맞선 사상가들, 미국 남부의 보수주의자 랜돌프와 칼훈, 토크빌의 민주적 독재론, 20세기를 전후한 시기 미국과 영국 보수주의의 좌절과 방황에 이르는 이야기들이 다소 복잡하지만 풍성하게 펼쳐진다.

이런 논의를 통해 저자는 보수주의자와 보수주의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도덕적·사회적 질서의 원칙을 이해하는지 규명한다. 이를 위해 제시하는 것이 보수주의 사상의 여섯 가지 핵심 가치(기둥)와 보수의 10대 원칙이다. 10대 원칙에 담긴 보수주의자는 이렇다.

‘불변의 도덕적 질서와 규범이라는 원칙을 믿는다. 관습, 널리 오랫동안 합의된 지혜, 계속성을 중시한다. 신중함이란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다양성의 원칙을 중시한다.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원칙에 따라 스스로를 억제한다. 자유와 재산권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믿는다. 자발적인 공동체를 지지하고 강제적인 집산주의에 반대한다. 인간의 격정과 권력을 신중하게 자제해야 할 필요를 인지한다. 활력이 넘치는 사회라면 영속성과 변화를 반드시 인정하고 조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에 따르면 보수주의자라고 해서 사회적 개선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지적인 보수주의자는 계속성의 요구와 전진의 요구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저자는 1986년 이 책의 7차 개정판 서문에서 이렇게 설파했다.

“어느 사회나 건강하게 작동하려면 개선하려는 추진력과 보존하려는 추진력이 모두 필요하다. 시대의 환경에 따라 우리는 진보 쪽에 힘을 보탤지 아니면 계속성에 무게를 두어야 할지를 결정한다. 현대 사회는 눈이 핑핑 도는 속도로 변화한다. 그에 따른 도덕적 질서와 시민적 질서의 해체를 막는 데 지금의 보수적 추진력은 충분할까. 그 사실 여부는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이 얼마나 그들의 유산을 잘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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