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데스크 시각] 4·3 그리고 '민주기지론'

입력 2018-04-08 18:24  

백광엽 지식사회부장


문재인 대통령이 제주를 직접 찾아 ‘항구적인 평화와 인권을 향한 열망’이었다며 4·3을 상찬했다. ‘결코 잠들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낡은 이념의 굴절된 눈’으로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힐난했다.

이어 지난 주말에는 광화문에서 제주 4·3 단체들의 상경 집회가 열렸다. 그들은 ‘4·3은 학살이고, 주범은 미국’이라는 과격한 구호를 외쳤다. 미 대사관을 찾아가 사죄를 요구하고, 이적단체 범민련 등이 연 ‘통일방해 내정간섭 미국 규탄대회’에도 힘을 보탰다. 북핵 위기의 절정에서 동맹을 극렬 비난하는 행태는 ‘낡은 이념’의 포로가 누구인지 의구심만 키우고 말았다.

대통령은 4·3 희생자 추념사에서 ‘국가폭력’을 깊이 사과한다고 했다. 제주의 상처를 보듬으려는 뜻이었겠지만 오해를 부르기에 충분하다. 유엔 의 압도적 결의에 따른 5·10 총선거를 저지하려고 경찰서를 무장습격한 반동을 지켜만 봐야 했다는 것인지….

4·3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로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 때 작성돼 편향성 논란이 제기된 ‘4·3 진상보고서’에도 적시된 사실이다. 그 시절 제주 도민의 70% 정도는 좌익사상에 경도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격리된 섬의 열악한 경제 사정은 신생국의 ‘어린 자유민주주의’가 착근하기에는 치명적인 환경이었을 것이다.

'국가폭력'에 대한 오해

토벌 과정에서의 줄이은 양민 희생은 형언하기 힘든 비극이었다. 유격대 기습에 당한 군과 경찰이 부근 마을주민을 집단학살하는 참극도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법적 국가폭력이라는 식의 단언은 부적절하다. 국가는 ‘일정 영역 안에서 폭력행사의 독점을 실효적으로 요구하는 공동체’(막스 베버)이기 때문이다. ‘실효적 요구’란 불법폭력에는 대항폭력을 행사한다는 의미다. 세금 강제도, 사형 선고도 이런 국가폭력의 일환이다. 문 대통령의 폭력 운운은 ‘합법적 폭력의 독점체’인 국가의 존재 방식에 대한 부정이거나 이해 부족이다.

4·3은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번영에 크게 기여했다. 4·3사건 6개월 뒤 여순사건이 터졌다. 여수 주둔 14연대 하사관들이 제주 토벌 출동명령을 거부하며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를 계기로 군내 남로당 제거작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초급장교나 하사관 세 명 중 한 명꼴로 좌익이었을 정도로 실상은 충격적이었다. 6·25 발발 1년 전에 끝낸 이 숙군작업 덕에 남로당수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장담했던 ‘전쟁 시 남한 내 동조 봉기’가 불발됐고, 이는 승리로 이어졌다.

철 지난 '민주기지론' 부활?

4·3을 둘러싼 일련의 상황 전개에서는 한때 386을 매료시켰던 내밀한 ‘민주기지론’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소련군 후원으로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에 성공한 북한을 미 군정으로 좌절된 남한 혁명을 추동하는 기지로 보는 관점이다. 정해구 정책기획위원장이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호의적으로 소개하며 제도권에 진입시킨 북한의 대남 통일전략이다. 인민대중과의 통일전선적 연대로 미제에 종속된 남한에 ‘인민 정부’를 세우는 것이 민주기지론의 목표다. ‘자주적 인민공화국 수립 때까지 투쟁하겠다’던 4·3 세력의 포고령은 민주기지 노선의 연장선에 있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4·3을 ‘최초의 통일운동’이라 지칭한 것도 민주기지론적 사고에 닿아 있다.

잔인했던 제주의 4월로부터 70년이 지났다. 역사의 박물관에 들어가야 할 민주기지론의 복권 시도가 있다면 시대착오적이다. 낡은 이념의 굴절된 눈과 유희적 언어로 진실을 덮어서는 안 된다.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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