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팻 핑거' 사고에 드러난 인간의 욕망

입력 2018-04-12 17:28  

英 베어링은행 파산 사건 그린 '겜블'처럼
영화 같은 현실이 반복되는 상황 씁쓸해

이윤정 < 영화전문마케터·퍼스트룩 대표 >



28세의 한 젊은이가 있다. 그리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젊은이다. 유명 은행에 취직한 것을 감지덕지해야 할 것 같은 이 청년은 승승장구하던 끝에 자신이 몸담고 있던 그 유명한 은행 문을 닫게 만든다. 200년이 넘는 역사의 이 은행은 금융 강국 영국에서도 1990년대 중반까지 손에 꼽히던 은행이었다. 왕실과의 잦은 거래로 ‘여왕의 은행(Queen’s Bank)’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1995년 이 젊은 직원의 무모한 투자로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파산에 이른다. 같은 해 네덜란드 최대 금융그룹 ING에 인수되는데, 인수가는 단돈 1파운드(약 1500원)였다. 영국 베어링은행과 닉 리슨 이야기다.

싱가포르 지사의 파생상품 딜러에 불과했던 닉 리슨이 거대 은행을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불법거래가 있었다. 한직이었던 말레이시아에서 근무할 당시 급격한 경제 성장 덕에 높은 수익을 올린 리슨을 본사는 아시아 금융의 요충지 싱가포르로 발령을 낸다. 리슨의 불법거래는 싱가포르에서 시작됐는데, 그 출발은 마지막 부도 금액에 비하면 아주 미미했다.

수신호 거래를 하던 싱가포르 주식시장에서 직원의 실수로 예기치 않게 2만파운드의 손실이 발생한다. 리슨은 이를 본사에 보고하지 않고 비밀리에 ‘88888’이란 계좌를 만들어 손실을 은닉한다. 그리고 이 손실을 상쇄시키기 위한 부정거래를 계속했는데, 비밀계좌에 은폐시킨 손실액은 점점 더 커져 1994년 말에는 5억달러가 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베어링은행에 어떤 존재였는가. 2년 연속 최고 매니저상을 수상한, 1993년 당시 베어링은행 수익의 20%를 올리는 최고 딜러였다. 회사는 그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조직 내 감시 시스템은 최고 수익을 내는 그의 팀에 적용되지 않았다. 회사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부정은 계속됐다. 결국 1995년 베어링은행 자기자본의 두 배에 달하는 1조5000억원에 가까운 손실이 비밀계좌에 은폐된 것이 드러났고 베어링은행은 파산한다.

이 영화 같은 이야기는 닉 리슨이 수감생활 후 펴낸 《악덕 거래인(Rogue Trader)》이란 제목의 자서전에 실렸고,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겜블(Gamble)’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됐다. 영화의 원제는 자서전과 같은 ‘악덕 거래인(Rogue Trader)’이었는데, 국내 개봉 제목은 ‘도박’이란 뜻의 ‘겜블’을 썼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금융이란 게 실체가 없는 무형의 것이라서 그런지 실체를 구현하기 어려운 인간의 욕망과 쌍둥이처럼 닮아있다고 느끼곤 한다. 그래서 영화는 끝없는 욕망을 통해 인간을 탐구하고 싶을 때 금융가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곤 하는데 이 중 볼 만한 명작들이 많다. 투자가 투자로 끝나지 않고 투기로 변질돼 갈 때, 욕망이 범죄로 선을 넘을 때, 부조리한 욕망이 사회의 부족한 혹은 부주의한 시스템과 결합될 때 어떤 결과를 내게 되는지 많은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주목해 왔다. 그런 이야기의 원전이자 전설로 꼽히는 올리버 스톤 감독의 ‘월 스트리트’,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한 ‘빅쇼트’,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영화상 수상작인 ‘인사이드 잡’,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마진콜’, 도빌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보일러룸’을 추천한다.

얼마 전 한 증권회사에서 발생한 ‘팻 핑거’(주식 매매 가격이나 주문량을 실수로 잘못 입력하는 것) 실수가 대형사고로 이어졌다. 역사는 반복됐는데도 매번 시스템 부재 타령을 하는 현실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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