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소도시 리바디아에는 샘이 하나 있다. 신화에 따르면 오른쪽은 므네모시네(Mnemosyne) 즉 기억의 샘물이고, 왼쪽은 레테(Lethe) 즉 망각의 샘물이라고 한다. 둘은 하나로 모여 시내를 이루는데 그 이름이 라이프(Life), 인생이라는 뜻이다. 우리 삶이 수많은 기억과 망각으로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기억은 뇌에 새겨진 자극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을 통해 들어온 자극은 뇌의 각 부위에 흔적을 남기며 저장된다. 보통 즐거웠던 기억과 슬픈 기억이 오래 남는다. 기억은 점차 망각되는데 그 원인으로 시간의 경과를 들기도 하지만 다른 정보 때문에 기억해야 할 정보를 잊어버리게 된다는 이론이 우세하다.
수사나 재판과정에서 서로 다른 기억이 대립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그 원인 중 하나는 기억의 왜곡에서 찾을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기억 왜곡 현상은 상당히 체계적이며 구성적이다. 사람들은 경험한 그대로를 기억하기보다는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모습으로 그 내용을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실제 있었던 일을 ‘역사적 사실’로,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한 기억을 ‘서사적 사실’로 구별하기도 했다.
또 다른 원인은 기억이 언어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허위가 개입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과거부터 기억에 관한 진술 속에 숨겨진 거짓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원전부터 표정과 행동에서 거짓의 단서를 찾으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19세기 말에는 거짓말과 혈압, 맥박의 상관관계 연구가 시작돼 지금의 거짓말탐지기가 개발됐다. 최근에는 뇌과학 발달에 따라 뇌 활동을 직접 측정하는 방법도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거짓말을 찾아내더라도 왜곡되거나 사라진 기억 너머의 진실까지 밝혀내진 못한다. 단순히 마음의 문제를 치유하는 일이라면 정말 그 일이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기억이 범죄와 관련된 것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수사와 재판은 기억 속 사실을 끄집어내 죄를 묻는 게 아니라 실제 그 일이 있었는지 밝히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억에 의존하는 진술 위주의 수사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고 객관적 증거를 찾기 위한 과학수사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과학적 기법을 통해 밝혀지는 과거의 파편화된 사실들이 전문가의 논리적 추론과 통찰을 거치면서 의미와 맥락을 가진 역사적 사실로 생생하게 드러난다.
기억은 왜곡되거나 망각되기 쉽다. 그렇다고 역사적 사실까지 변하진 않는다. 과학수사는 기억 저편에 남아 있는 진실을 찾아 무고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죄지은 이에게 응분의 벌을 받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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