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경 기자 ] 증오와 분노의 감정이 여러 층으로 쌓이더니 빠르게 확장돼 갔다. 주요 인물의 세밀한 심리 묘사가 극을 끝까지 긴장감 있게 끌고 간다. 지난달 26일 LG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려 오는 5일까지 이어지는 한태숙 연출의 연극 ‘엘렉트라’(사진) 얘기다. ‘소포클레스 3대 비극’으로 꼽히는 그리스 고전을 고연옥 작가가 각색했다.
뿌리 깊이 응어리진 엘렉트라(장영남 분)의 분노는 커다란 정의와 단순 복수심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한다. 한 개인에서 시작된 갈등이 인간 자체, 더 나아가 시민으로서의 고민과 혼란으로 커져간다. 엘렉트라는 아버지 아가멤논 왕을 죽인 어머니 클리탐네스트라(서이숙 분)를 원작과 달리 극의 초반부터 인질로 잡고 개인적인 원망을 표출한다. 그러다 어머니의 정부이자 왕이 된 아이기스토스(박완규 분)의 독재와 횡포에 대한 분노가 엘렉트라뿐 아니라 그의 형제, 게릴라군을 통해서도 부각된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선 잔인한 운명으로 밀어 넣은 신에 대한 인간의 커다란 탄식으로 발산된다.
무대 배치는 다소 단순하고 활용도가 높진 않았다. 하지만 확장된 감정선을 담아내는 그릇 역할을 해냈다. 성전을 파괴한 뒤 만든 지하 벙커가 그랬다. 성전의 천장이 무너진 듯한 커다랗고 사각진 돌들 위를 활보하는 인물들로부터 신이 정해준 운명을 자신들의 발로 꾹꾹 억누르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반면 아무리 거역하려 해도 거스를 수 없는 신의 뜻은 딸을 향한 저주를 빌고 있는 클리탐네스트라의 목소리를 통해 잘 표현됐다. 그가 무대 아래와 위를 오가며 엘렉트라와 게릴라군을 조롱하고, 그의 죽음이 계속해서 유예되는 설정도 인상적이었다. 안간힘을 쓰는 인간들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는 신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엘렉트라보다 클리탐네스트라, 아이기스토스 등 적들의 논리가 더 부각돼 다소 아쉬웠다. 감정이 팽팽하게 대치하기보다 쏟아지는 비난에 대한 엘렉트라의 변명이 반복되는 듯했다.
개연성이 부족한 장면들도 있었다. 엘렉트라의 남동생 오레스테스(백성철 분)는 원작에선 타고난 영웅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선 과거를 외면하고 자유롭게 살기 원하는 인물로 나온다. 자신을 마음 편히 놓아달라고 계속 주장하던 그는 돌연 숙명을 받아들이고 함께 복수를 꿈꾸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 심적인 변화가 치밀하게 그려지지 못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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