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사람들은 뜨거운 물이 나오는 이곳을 탕정(湯井)이라고 불렀다. ‘온조 36년(서기 18년)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백성을 살게 했다’는 기록을 보면 역사의 뿌리가 2000년 전까지 가 닿는다. 고려 이후 온수(溫水)·온천(溫泉)으로 불리다 세종 때부터 지금의 온양(溫陽)으로 불렸다.
평생 안질과 피부병에 시달린 세종은 온천욕 효과에 큰 기대를 걸었다. 1433년에는 이곳에 행궁(行宮·궁궐 밖 거처)을 짓고 대규모 목욕시설을 갖췄다. 세종은 ‘경기 지역에서 온천을 찾아내는 사람에게 후한 상을 주고 해당 읍의 칭호를 승격시키겠노라’고 했지만 가까운 온천을 찾는 데 실패하자 이곳 충청도까지 행차했다.
온양은 이후에도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의 휴양·치유소로 사랑받았다. 세조는 1458년 온천 옆에서 냉천을 발견하고 신정(神井)이라 불렀다. 성종은 이를 기념해 신정비(神井碑)를 세웠다. 사도세자는 다양한 한약재를 온천에 넣어서 이용했다. 이곳을 가장 많이 찾은 왕은 종기와 피부병이 심했던 현종이다. 그는 정유재란 때 파괴된 행궁을 100칸 규모로 복원했다.
온양행궁이 근대적 건물로 바뀐 것은 구한말 때였다. 일본 자본가들이 온양온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05년 일본식 온천여관인 온양관(溫陽館)을 지었다. 장항선 철도를 건설한 경남철도가 이를 넘겨 받아 신정관(神井館)이라는 온천 리조트로 재단장했다. 세조 때의 이름 신정(神井)을 딴 것이다.
1928년 개관한 신정관은 동양 제일의 온천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일본 효고현의 유명한 온천도시 다카라즈카(寶塚)를 본떠 ‘조선의 다카라즈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때부터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았다. 6·25 전쟁 직후인 1953년 교통부는 잿더미가 된 신정관 자리에 온양철도호텔을 세웠다. 이것이 1967년 민영화에 따라 국내 관광호텔 1호인 온양관광호텔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호텔 왼쪽 주차장 너머에 신정비가 보관돼 있다. 호텔 오른쪽에는 사도세자가 영조를 따라와 활쏘기를 연습하던 영괴대(靈槐臺)도 있다.
이렇듯 역사가 깊고 사연 많은 온양관광호텔이 적자 끝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갔다고 한다. 1995년 첫 법정관리 후 경남기업으로 넘어갔다가 지난해 SM그룹에 인수된 지 1년 만에 또 벼랑 끝에 섰다. 따뜻하고(溫) 밝다(陽)는 이름 뜻과 달리 계속되는 불운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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