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자본시장 지킨 대가
대우증권서 '보장된 성공' 버리고
IB사업 뛰어들어 13년 만에 CEO로
증권사 최초로 인수금융 시장 진출
위험한 투자일수록 IB가 맡아야
꼼꼼한 '콜 리포트'가 경쟁력
직원들과 영업일지 공유문화 정착
10만여건 데이터로 맞춤 서비스
[ 김병근 기자 ] 지난 3월 말 서울 여의도 NH투자증권 본사 4층 강당에 이 회사 투자은행(IB)사업부 임직원 200여 명이 모였다. 3월23일 NH투자증권 사령탑에 오른 정영채 사장이 소집한 첫 IB사업부 전체 회의였다. 회의가 끝날 무렵 정 사장이 건의사항을 받겠다고 하자 한 직원이 손을 들었다. 그는 “야근을 자주 하는데 의자가 너무 불편하다”며 “낡은 의자를 새 의자로 교체해달라”고 했다.
정 사장은 “교체를 추진하겠다”고 답한 뒤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 “상품 담당 부서에는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편한 의자를 주겠지만 영업을 하는 부서는 ‘송곳 의자’로 바꿔주겠습니다.” 영업 담당 임직원은 사무실에 있지 말고 현장에 나가 고객을 만나야 한다는 그의 평소 지론을 강조한 것이다.
정 사장은 “‘IB의 본질은 고객과의 원활한 관계 구축”이라며 “고객이 원하는 걸 파악한 뒤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게 IB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불모지 IB 시장을 향한 도전
정 사장은 1988년 대우증권에 입사하며 증권업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후 지인 소개로 입사했지만 잠깐만 다닐 생각이었다. 학창 시절 금융인이 아닌 기업인을 꿈꿨기 때문이다.
자본시장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일에 재미를 느꼈다. 일에 빠지다 보면 퇴근 시간을 두세 시간씩 넘기기 일쑤였다. 그는 이렇게 쌓인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1997년 33세 나이로 대우증권 자금부장에 발탁됐다. 외환위기를 넘긴 대우증권에서 그는 다시 기획본부장으로 승진했다. 2005년 3월에는 IB 담당 본부장(상무)에 올라섰다.
그는 상무 승진 보름 만에 돌연 사표를 쓰고 대우증권을 떠났다. 주위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행보였다.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걸고 당시 불모지였던 한국 IB산업을 개척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정 사장은 “잦은 경영진 교체로 불안정했던 대우증권 대신 우리투자증권(현 NH투자증권) IB사업부 대표를 택했다”며 “위탁수수료 외에 증권사가 먹고살 방법을 IB 쪽에서 찾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2005년 당시 우리투자증권 IB사업부 대표를 맡은 지 13년 만인 올 3월 회사 경영의 지휘봉을 잡았다.
“현장으로 나가 고객 만나라”
정 사장은 “IB의 본질은 첨단 금융기법이나 거액이 오가는 화려한 거래가 아니라 고객과의 네트워크”라고 말한다. 고객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현장에서 고객을 많이 만나는 게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정 사장이 13년 전 IB사업부를 맡으면서 가장 먼저 도입한 건 고객과의 만남을 독려하기 위한 ‘일정 공유’였다. 말 그대로 모든 임직원이 자신의 일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서로 알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다.
지나친 통제라며 반발하는 임직원도 적지 않았다. 정 사장은 “개인 약속을 문제 삼을 생각은 없다. 단지 자율적으로 고객과의 접점을 늘리자는 것”이라며 임직원을 설득했다. 정 사장이 자신의 일정을 먼저 공개하며 솔선수범하자 직원들이 따라왔고 어느새 IB사업부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NH투자증권이 IB업계에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게 된 비결 중 하나로 꼽히는 ‘콜 리포트(call report)’도 정 사장의 아이디어다. 콜 리포트란 고객과 만나 주고받은 얘기를 꼼꼼하게 기록하는 일종의 영업일지다. “고객 정보가 쌓이면 맞춤형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고객제일 정신’의 발로였다. 연간 최대 8000여 건이 작성되는 콜 리포트는 이제 누적으로 10만 건을 훌쩍 넘겼다.
정 사장 자신도 항상 고객과 만나기 전 콜 리포트를 꼼꼼히 읽고 만난 뒤에는 빠뜨리지 않고 리포트를 작성한다. “정 사장은 고객에게 맞춰 응대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IB업계의 평가는 이런 노력에서 나온다.
IB 신시장 개척의 길
정 사장은 한국 IB산업을 개척해온 인물로 통한다. 은행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인수금융 시장에 뛰어든 게 대표적이다. 사모펀드(PEF) 등은 기업을 인수합병(M&A)할 때 자금의 일부를 외부에서 차입한다. 이 인수금융 규모가 수천억원에 달하는 거래도 많다. 은행에 비해 자금 여력이 달리는 증권사들은 도전할 엄두도 못 내던 일이다.
NH투자증권은 2013년 증권사 최초로 인수금융 시장에 진출했다. 국내 최대 PEF 운용사 MBK파트너스가 아웃도어 업체 네파를 인수할 때 자문을 맡는 동시에 인수금융도 제공했다. ‘위험이 너무 크다’는 주위의 만류를 정 사장은 “위험한 일이니까 IB가 해야 한다”며 뿌리쳤다. NH투자증권은 인수금융 부문에서만 매년 200억원가량을 벌어들이고 있다.
은행이 아니라 증권사 주도의 구조조정을 처음으로 성사시킨 것도 정 사장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웅진코웨이를 매물로 내놓은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은 매각을 이틀 앞두고 돌연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해 채권단을 당황하게 했다. 정 사장이 윤 회장을 직접 만나 “웅진코웨이와 웅진케미칼을 매각해야 작게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설득한 끝에 매각작업이 재개됐다. 매각 자문을 맡은 증권사가 전면에 나서 얽힌 실타래를 풀어낸 사례로 업계에 회자되고 있다.
■ 정영채 사장 프로필
△1964년 경북 영천 출생
△1982년 경북사대부고 졸업
△1986년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1988년 옛 대우증권 입사
△1997년 대우증권 자금부장
△2000년 대우증권 IB부장 및 인수부장
△2003년 대우증권 기획본부장
△2005년 대우증권 IB본부장(상무)
△2005년 옛 우리투자증권 IB사업부 대표
△2015년 NH투자증권 IB사업부 대표(부사장)
△2018년 NH투자증권 사장
■ 3년 연속 IB업계 '최고 파워맨' 선정… "대형 M&A 거래 독보적"
한경 마켓인사이트 설문서 48.8% 압도적 득표
'실적 효자' IB사업부, 이익 1000억 업계 첫 돌파
정영채 NH투자증권 사장(사진)은 국내 투자은행(IB)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힌다. NH투자증권 IB사업부 대표였던 2015~2017년 3년 연속으로 국내 IB업계 최고 ‘파워맨’으로 선정됐다.
한국경제신문 자본시장 전문매체인 마켓인사이트가 국내외 증권회사와 연기금, 사모펀드(PEF) 운용사 대표를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다. 올초 정 사장의 득표율은 48.8%로 전년 23.5%의 두 배 이상으로 높아졌다.
NH투자증권 IB사업부도 2016~2017년 2년 연속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IB 하우스’로 뽑혔다.
NH투자증권 IB사업부의 지난해 경상이익은 1708억원으로 회사 전체 경상이익(4425억원)의 38.6%를 차지했다. IB사업부의 이익 기여도가 전체의 3분의 1을 넘어섰다. 2010년 IB사업부 경상이익이 374억원으로 회사 전체(2893억원)의 12.9%였던 점을 감안하면 7년 만에 기여도가 세 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IB사업부 경상이익이 1000억원을 넘은 것도 2015년(1005억원) NH투자증권이 처음이었다. NH투자증권은 기업공개(IPO)뿐 아니라 인수합병(M&A) 자문과 인수금융, 주식·회사채 발행 주관 등 IB 전 부문에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정 사장이 2005년 우리투자증권(현 NH투자증권) IB사업부 대표를 맡을 당시 업계 7~8위 수준이란 평가를 받던 것에 비하면 괄목상대한 성장이다.
이 회사의 IB사업부 관계자는 “정 사장은 처음부터 특정 IB부문에서 1등을 하는 것보다 여러 부문에서 고루 잘하는 ‘올 라운드 플레이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NH투자증권 각 부문이 서로 시너지를 내며 선순환하는 구조가 정착된 배경이란 설명이다.
김병근 기자 bk1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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