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지민 기자 ]
“늦게 데뷔한 데다 원하는 만큼 주목받지 못했어요. 힘에 부쳤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가장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힘든 걸 견뎌낼 수 있다는 안정감이 생겼거든요.”
배우 권율(37)이 “20대에 꿈이 많았다면 지금은 하루하루 성실하게 연기하고 싶다”며 이렇게 말했다. 선과 악을 오가며 다양한 연기를 선보여온 권율이 지난 1일 개봉한 영화 ‘챔피언’에서 또 한 번 연기 변신을 시도했다. 그는 영화에서 팔씨름 선수 마크(마동석)를 챔피언으로 만들어 한탕 챙기려는 잔머리꾼 진기 역을 맡았다.
‘챔피언’은 개봉 첫날 관객 13만 명을 동원했다. 앞서 개봉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개봉 8일째에 600만 명을 돌파하며 그간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가운데에도 박스오피스 2위에 오르며 선전하고 있다.
마크 역의 마동석이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주도한다면 권율은 능청스러움과 진중함을 오가며 극의 뒷심으로 활약한다. 영화의 흐름상 진기의 출연 분량이나 비중은 마크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권율은 영화에 표현되지 않은 부분까지 고민하며 ‘진기’라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베테랑 배우들도 어렵다고 토로하는 코미디 연기다. 권율은 짧은 영어를 과장되게 말하거나 강자 앞에서 비굴해지는 모습 등으로 관객들을 웃긴다. “동네에서 말깨나 한다”고 자부하는 권율이지만 코미디 연기는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감독님은 ‘최악의 하루’(2016)에서 보여줬던 뻔뻔한 남자친구의 모습보다 조금 더 가볍고 밝은 느낌을 주문했어요. 코미디 연기를 해봤던 마동석 형에게 많이 물어보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진기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코미디 호흡을 갖고 연기하는 선배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됐죠.”
‘챔피언’에서 권율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마동석과 함께해 더욱 빛이 났다. 권율은 10년 전 영화 ‘비스티 보이즈’에서 마동석과 만난 뒤 계속 인연을 이어왔다. 실제 친분 덕분에 영화에서 찰떡 케미가 돋보였다는 평가다.
“현장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벽을 부수는 시간이 필요한데 마동석 형과는 그럴 필요가 없어 편했습니다. 과감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었죠. 형은 10년 전 처음 봤을 때부터 존재감이 강했어요. 후배로서 존경하죠.”
권율은 2007년 SBS 드라마 ‘달려라 고등어’로 데뷔했다. 당시 26세였다. 10대 배우들의 등장에 비하면 꽤 늦은 데뷔였다. 그래서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빨리 주목받고 싶었지만 녹록지 않았다. 그땐 조급했다고 그는 털어놨다. 이젠 여유가 생겼다. 2011년 단역으로 출연한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자신이 나온 찰나의 장면을 열심히 설명하다가 웃음을 터뜨릴 정도가 됐다.
배우 최명길이 권율의 이모라는 사실은 데뷔하고 6년 뒤인 2013년에야 알려졌다. 이를 굳이 밝히지 않은 건 가족관계로 반짝 화제를 얻기보다는 배우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서였다. 그런 진심이 통해서였을까. 권율은 2014년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의 아들 이회 역으로 열연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캐릭터부터 반전 캐릭터, 악역 등을 소화하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온 그는 “나만의 색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거창한 목표보다는 성실하게 연기하고 싶어요. 계속 주연을 맡고 크게 사랑받는 선배들을 보면 잠도 못 자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더라고요.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걸 보면서 저 역시 성실하게 달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하지 않은 시간을 견뎌온 권율은 매일 한 줄이라도 일기 쓰는 습관이 생겼다고 했다. 간절하게 바라던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 자신을 격려하는 방법이란다.
“배우에겐 승진 시험이 없잖아요. 대신 정체되면 우울증에 빠지죠. 부정적인 생각이 생기는 걸 미리 경계하기 위해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매일 비슷한데 ‘절실’ ‘감사’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것 같아요.”
현지민 한경텐아시아 기자 hhyun418@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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