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백주대낮 '野 원내대표 폭행'… 의회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입력 2018-05-06 18:29  

박동휘 정치부 기자

김성태 폭행사건 벌어졌는데
한국당 "테러 진상 밝혀야"
與 "국회 복귀하라"며 대립

여야 모두 당리당략에 골몰
툭하면 장외투쟁·극한대치
靑은 지지율 앞세워 '국회 패싱'

협치 실종…'국회 탄핵' 여론 자초



[ 박동휘 기자 ]
의회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정쟁으로 두 달째 멈춰선 국회는 조롱과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급기야 제1야당 원내대표가 대낮에 국회에서 폭행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국회가 기능을 상실하면서 ‘국민제안 법률제’까지 등장하는 등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5일 국회 본관 앞에서 이른바 ‘드루킹 특검’을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이던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한 30대 남성에게 턱을 가격당해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는 일이 발생했다. 김 원내대표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국회 본관 앞 계단을 오르자 김씨는 악수를 청하는 척하면서 김 원내대표의 턱을 가격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폭행당한 김 원내대표는 계단에 쓰려졌고, 119 구급대에 의해 인근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옮겨졌다.

한국당은 6일 이 사건을 ‘국회 테러’로 규정하고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김 원내대표는 “대통령 정치만 있고, 대의민주주의는 실종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한국 국회가 처한 ‘불임’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건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의원 폭행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9년 2월 전여옥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 본청 앞에서 부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공동대표 등 5~6명의 여성에게 공격을 받았다. 당시 김형오 국회의장은 “헌법기관이자 국민의 대표에 대한 명백한 테러”라고 말했다.

9년여 뒤 같은 일이 벌어졌지만 ‘국회 테러’라는 한국당의 주장은 반향 없는 메아리에 그치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는 “의원 한 명이 맞았다고 국회를 멈춘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등의 댓글로 도배됐다.

정치권에선 이번 일을 단순 폭행사건으로 치부하기에는 국회의 위상 추락과 의회 민주주의 위기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군사독재 시절 ‘통법부’로 불리던 국회가 민주화와 함께 입법기관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했지만 이후 정치권이 집단이기주의에 취해 스스로 ‘국회 탄핵’을 불러올 정도로 국민적 불신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송수현 대한변호사협회 입법평가특별위원은 “대화와 타협에 의해 국회 회의장에서 입법권을 행사해야 할 의원들이 장외투쟁과 길거리 농성 등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행위를 일삼는 것에 대한 비판이 많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은 국회 정상화를 볼모로 ‘드루킹 특검’을 관철하려는 한국당과 ‘4·27 판문점 선언’ 관련 국회 비준을 특검 수용의 대가로 요구한 더불어민주당이 협치를 포기하고 당리당략을 앞세운 결과다. 정치학자들도 의회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적인 책임은 국회에 있다고 지적했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20대 국회는 역대 가장 인기 없는 국회”라며 “정치 불신이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여야 간 정쟁이 국회를 두 달째 마비 상태로 만들면서 최저임금 논의와 일자리 추가경정예산 심의 등 민생현안까지 모두 빨아들였다.

국회를 불능으로 만들어 놓은 채 페이스북 등 인터넷 여론몰이에 몰두하는 정치인의 행태도 문제로 꼽힌다. 입법화 여부에 상관없이 일단 발의하고 보자는 식의 의원입법 남발도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이날까지 20대 국회에 올라온 의원입법은 1만1743건으로 19대 국회 전체(1만5444건)에 육박할 정도다.

국회의 위상 추락은 급기야 직접민주제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 2일 선거권자 20만 명 이상이 요구하는 법률안은 국회 상임위원회에 자동으로 상정되도록 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회의 ‘개점휴업’을 견제하기 위한 차원이라지만 이 역시 헌법에 위배된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헌법 제52조는 법률안 제출 권한을 국회와 정부로 한정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청와대의 독주도 의회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대통령제는 삼권분립을 기초로 유지됨에도 정권 출범 초기엔 청와대의 독주가 되풀이된다는 점 역시 ‘국회 패싱’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남북한 정상회담 성과에 대한 국회비준 논쟁이 대표적인 사례다. 국회 관계자는 “판문점 선언이 비준의 대상인지, 비준안엔 어떤 내용이 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협의조차 없이 청와대가 일방적으로 국회를 압박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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