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 길라잡이<43>] 정화의 해외원정

입력 2018-05-14 09:01  

바닷길 대항해는 통상에 일찍 눈 뜬 서유럽이 주도
명나라 때 정화 원정이 반짝 행사로 끝난 이유 있어




대항해 시대 바닷길을 통한 해외 개척은 흔히 유럽의 전유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서 쪽 끝자락에 있어 비단길은커녕 지중해 무역에서 소외돼 있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 새로운 바닷길 개척에 나섰기 때문이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아프리카 희망봉 발견,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항로 발견, 마젤란의 세계 일주가 그것이다.

일곱 차례 대원정 떠난 정화

하지만 이는 완전한 사실은 아니다. 동양에서도 바다를 통한 해외 원정에 나선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명나라 대도독 정화의 원정이었다. 정화는 영락제의 명을 받아 1405년부터 1431년까지 총 일곱 차례에 걸쳐 대원정을 떠난 것으로 유명하다. 서양 방문 해상사절단의 총사령관으로서 그는 수십 척의 배에 수만 명의 인원을 거느리고 원정에 나섰다. 그의 선단은 동남아시아, 인도, 페르시아만,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아프리카 동부 해안까지 나아갔다. 이때 각국의 외교사절단을 중국으로 데려와 경제, 문화적 교류를 촉진했다고 한다. 정화의 원정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탐험보다 70여 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정화의 원정에서 사용된 배도 콜럼버스의 것보다 무려 30배나 큰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화의 원정은 콜럼버스에 비해 거의 아무런 역사적 반향을 남기지 못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정화의 원정은 중화사상과 명나라 황제의 위신을 세계만방에 떨치기 위해 기획된 고도의 정치적 행사였던 것이다. 정화의 원정대는 서유럽의 탐험가들처럼 이윤을 목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공무원 정화·사업가 콜럼버스

정화가 수행한 교역은 국가 주도의 조공 무역이 대부분이어서 원정 참여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먼 곳으로 나아갈 동기가 부족했다. 중국이 해외 원정에 적극적이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읽는 세계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당시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었던 중국은 경제적으로 별로 아쉬울 게 없었기에 중국 황제는 해외 원정에서 예상되는 돈벌이에 소극적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욕구란 언제나 무언가 부족할 때 나오는 법이다.

정화는 명나라 영락제의 심복으로 해군 제독으로서 매우 뛰어난 기량을 보여줬지만 본래는 환관이었다. 출신도 한족이 아니라 투르크 계열의 이슬람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락제가 황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워 환관들의 우두머리가 됐고 권력의 정점에 이른 인물이다. 그의 출신 배경 때문에 중국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에서도 일부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해외 원정대의 수장으로 정화가 지목된 건 그의 이런 국제적 배경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하지만 환관이란 출신의 한계는 그가 황제가 지시한 사항을 뛰어넘는 활동은 하지 못하도록 제약했을 가능성이 크다. 콜럼버스가 유럽 원정에 드는 막대한 투자를 받기 위해 수많은 군주를 찾아가 자신의 원정 계획서를 제시하며 설득했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정화는 뛰어난 능력에도 결국은 공무원이었던 반면 콜럼버스는 숱한 결함을 지닌 인물이었지만 뼛속부터 사업가였다.

통상을 풀이하자면 ‘상업을 통한다’는 뜻이다. 나라들 사이에 서로 물품을 사고판다는 뜻이다. 정화의 원정은 기획, 투자, 실행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동기가 정치적인 데 있었기에 황제가 바뀌는 등 정치 권력의 변화에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정화가 죽은 뒤 명나라는 다시 쇄국정책으로 돌아갔고 이후 원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화가 남긴 기록을 태우다

이후 대항해를 주장하는 얘기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나 유교적 성향을 지닌 관료들이 원정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이유로 반대해 번번이 물거품이 됐다. 해외 원정이 지속될까 두려웠던 명나라의 관료들은 정화가 남긴 원정 기록을 모두 소각했다. 막대한 국가 재정이 들어간 대역사의 기록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정화의 원정에 대해 잘 모르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통상이 없는 개방, 경제인이 없는 교류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더 나은 세상에서 더 나은 경제적 동기를 찾아 헤맨 사람들이 오늘날의 세계와 세계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중국인이 아니라 서유럽 사람들이었다.

◆ 기억해주세요

명나라의 관료들은 정화가 남긴 원정 기록을 모두 소각했다. 막대 한 국가 재정이 들어간 대역사의 기록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정화 의 원정에 대해 잘 모르게 된 원 인이다.

최승노 < 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choi3639@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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