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경험이 부족한 학자가 벽에 부딪히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비서실에서 일한 전직 장관 A씨의 말이다. 우선 현실 부정부터 하고 본다. 겉으로 보이는 숫자는 현실이 아니라는 식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도 정책이 시장에 먹히지 않으면 어쩔 줄 몰라 한다. 정책을 오랫동안 다뤄본 관료들은 대안을 검토해 ‘플랜B’를 뚝딱 만들어 내지만, 이들은 ‘멘붕(멘탈붕괴)’에 빠져 헤매다 제풀에 꺾여 하차한다.
경제라인 최고 실세로 평가받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최근 잇단 발언을 보면서 A씨 말이 떠올랐다. 장 실장은 고용지표 악화에 대해 “최저임금 인상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펴고 있다. 지난 15일에는 한 연구원의 분석 보고서를 인용해 같은 주장을 거듭했다.
장 실장이 인용한 이 보고서, 알고 보니 노동연구원이 작성한 것이었다. H선임연구위원이 쓴 보고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실증 분석 결과, 사업주들은 근로자 수를 줄이기보다는 근로 시간 단축 등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보고서는 고용량에 유의미한 영향은 없었다고 결론 내렸다.
고용악화, 최저임금과 무관?
하지만 이 보고서 결론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다. 노동경제학에서 ‘고용은 근로자 수(N) 곱하기 근로 시간(H)’이다. 근로자 수가 당장 줄지 않았더라도 근로 시간이 감소했으면 사실상 고용 총량은 줄어든 것으로 본다. 더구나 사업주 입장에서 최저임금 부담을 상쇄하기 위해 근로 시간을 먼저 줄였을 뿐 고용 조정은 곧바로 뒤따를 수밖에 없다. 세 명의 경제학자에게 보고서를 보여줬더니 하나같이 “보고서는 실증 분석에서 고용이 줄어든 것을 인정해 놓고, 고용량에 영향이 없었다는 이상한 결론을 낸 것”이라고 했다.
노동연구원은 정부 산하 국책연구원이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고용 영향이 없다는 청와대와 정부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주문자생산형(OEM) 보고서를 작성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까지 일고 있다.
장 실장이 ‘최저임금 인상≠고용 악화’를 주장하는 또 다른 논리는 “고용원이 있는 자영업자는 늘고,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는 줄고 있다”는 것이다. 말인즉슨 맞다. 이런 현상은 벌써 몇 달째다. 문제는 해석이다. “고용원이 있는 자영업자가 늘고 있다는 건 최저임금 영향이 없다는 증거”란 주장이다.
보고싶은 것만 봐선 안돼
하지만 이는 현실을 너무 단순화한 것이다. 고용원이 있는 자영업자가 늘어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예컨대 순증 추세인 프랜차이즈 가맹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부분 해당 분야 수요 독점인 만큼 당장 고용원 감소로 이어지진 않는다.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분을 보전하는 일자리안정자금을 타먹기 위해 가족 생계형 자영업자가 고용원을 둔 자영업자로 둔갑하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최근 나오는 고용지표 악화가 최저임금 인상 때문이 아니라고 볼 근거가 빈약한데,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주장하는 건 일종의 ‘현실 부정’이다. 최저임금 영향이 없다면 정부는 왜 일자리안정자금을 만들어 3조원씩이나 퍼붓기로 한 것인가. 그러니 “통계를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질 수밖에.
고용지표는 5월 이후에도 악화될 게 뻔하다. 그동안 고용을 떠받치던 제조업 경기까지 흔들리면서 경기에 후행하는 고용은 하반기로 갈수록 더욱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때 가서도 장 실장은 계속 보고 싶은 것만 볼 것인가.
jtch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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