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적자국채나 증세 불가피
CVID라야 국민 부담 감수할 것"
차병석 편집국 부국장
북한이 핵개발로 노린 전략적 목표는 두 가지였던 것 같다. 체제 안전보장과 경제개발을 위한 돈이다. 가공할 만한 핵무기를 보유해 누구도 김씨 세습 독재체제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더불어 핵으로 주변국을 위협해 돈을 뜯겠다는 속셈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4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핵·경제 병진노선의 성공을 선언하고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새 노선으로 밝힌 것에서도 이 전략이 읽힌다. 핵무기 개발을 끝낸 김정은이 안전판은 확보했으니 이젠 파탄 난 경제 살리기에 주력하겠다는 뜻이다.
북한이 미·북 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과 함께 경제지원을 핵심 의제로 요구하고 있는 배경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북한은 비핵화라는 상품을 최대한 비싼 값에 파는 게 당면 과제다. 김정은이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막판에 ‘판깨기’ 위협을 하고 있는 것도 비핵화 가격 끌어올리기 전략의 일환이란 분석이 있다.
그럼 북한 비핵화 가격은 얼마나 될까. 연구기관들은 북한의 기초적 경제개발에 들어갈 돈을 수백조원에서 2000조원까지로 추정하고 있다. 최대치인 2000조원은 올해 우리나라 정부 예산(428조8339억원)의 다섯 배에 달하는 규모다.
중요한 건 이 돈을 누가 지불하느냐다. 예측가능한 지불 주체는 비핵화로 북핵 위협에서 벗어나는 한국 일본 미국이다. ‘세 나라가 북한에 줄 비핵화 대가를 얼마씩 분담할 것이냐’는 치열한 줄다리기가 예상되는 과제였다. 하지만 ‘거래의 귀재’인 트럼프의 미국은 일찌감치 선수를 쳤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북한에 대한 경제적 보상을 언급하면서도 “미국 납세자들이 부담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미국은 북한에 체제보장이란 대가를 지불하는 만큼 경제적 보상은 한국과 일본이 하란 얘기다.
미국은 1994년 제네바합의 때도 북한 핵 동결의 대가인 경수로 건설 비용 46억달러를 한국과 일본에 각각 70%와 30% 부담시켰다. 가격 협상은 미국이 하고 돈은 한국과 일본이 내는 방식은 이번에도 되풀이될 공산이 크다.
일본은 그렇다 치고 우리는 북한의 비핵화 청구서에 지불할 돈을 얼마나 준비하고 있나. 아무리 국제기구와 민간 투자의 물꼬를 튼다고 해도 초기에 철도 도로 항만 등 인프라 건설엔 마중물로 정부 재정을 투입할 수밖에 없다. 이런 데 쓰자고 정부가 모아 놓은 돈이 남북협력기금이다. 그러나 이 기금의 사업비 잔액은 현재 9593억원, 그중에서도 남북 경제협력예산은 3446억원에 불과하다. 개성공단 조성비(정부·공공기관 4597억원)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결국 북한에 비핵화 대가를 지불하려면 정부가 대규모 적자국채를 발행하거나 세금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 둘 다 국민들 호주머니에서 나와야 하는 돈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부쩍 늘어난 복지와 공공 일자리 사업을 위한 재정도 모자랄 판에 대북 지원 부담까지 커지게 생겼다. 지난해 1500조원을 훌쩍 넘긴 국가부채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물론 북한 비핵화로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다면 수백조원도 아깝지 않을 수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사라지고 한국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늘어 경제가 더 성장하는 중장기 효과를 감안하면 대북 지원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위안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게 있다. 북한 비핵화란 상품을 우리가 비싼 값으로 산다면 거래만큼은 투명해야 한다. 북한 비핵화가 ‘불량 상품’이어선 안 된다. 북한이 핵무기를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으로 폐기(CVID)’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불완전한 비핵화라면 우린 앞으로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해야 할지 모른다. 돈은 돈대로 쓰고, 평화는 얻지 못하는 사기를 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가 ‘호갱’이 아니란 확신이 서야 국민도 기꺼이 북한을 향해 호주머니를 열 것이다.
chab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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