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연출은 원작이 지닌 페스트의 의미를 재확장했다. 질병 그 자체를 소재로 삼은 건 같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갈등과 위기로 재해석했다. 특히 높은 장벽으로 둘러싸인 섬으로 공간을 설정, 한국적인 상황을 떠올리도록 연출해 현재성을 확보했다. 이 덕분에 원작 속 과거의 인간 군상도 지금, 이곳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너무 묵직한 원작의 무게도 덜어주며 한결 관객 친화적인 무대로 꾸며냈다. 소소한 유머를 섞어 살짝 비트는 방식으로 다가가는 식이다. 자칫 어색할 수도 있지만 이를 자연스럽게 풀어내 메시지는 가벼우면서도 정확하게 전달됐다.
무대 활용도도 한껏 높였다. 대각선의 길을 중심으로 무대를 나누고 현재와 과거의 의사 리유(임준식 이찬우 분)를 한 자리에서 만나게 했다. 크나큰 고통이 휩쓸고 간 과거와 이를 회상하는 현재를 매끄럽게 잇도록 공간을 연출한 것이다. 미학적 요소 역시 돋보였다. 즉석에서 선보인 장 타루(이원희)의 피아노 연주는 비극성을 더욱 강화했다. 무대 가장 뒤편에 놓인 물길은 푸른 조명과 함께 빛나 인물들의 슬픔과 애절함을 드러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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