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규제 더해 '엘리엇 암초'까지
창업자 시절의 기업환경 절실하다
정구용 < 한국상장회사협의회 회장 >
고(故) 정주영 회장은 1937년 서울 신당동에 경일상회를 세우면서 현대그룹 신화를 열었다. 그의 도전 정신은 “이봐, 해 봤어?”라는 한 문장에 압축돼 있다. 2001년 3월의 어느 봄날, 그 꽃잎은 떨어져 흙이 됐지만 현대자동차 역사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현대차호(號)’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대양(大洋)에는 어마어마한 두 개의 태풍이 자리하고 있다. 하나는 세계 자동차시장에 불고 있는 초특급 태풍이다. 기존 글로벌 자동차시장에는 제너럴모터스(GM), 폭스바겐, 도요타, BMW 같은 초일류 자동차 제조사들만 존재했다. 물론 이들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넘기 힘든 큰 파도다.
그러나 2018년 글로벌 자동차시장에서는 이들도 쫓아가야 하는 자로 입장이 바뀌었다. 변화의 중심엔 자율주행 자동차가 있다. 전대미문의 새 자동차시장을 연 것은 구글, 우버, 애플, 테슬라 같은 정보기술(IT) 기업들이다.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의 공통점은 자동차라는 껍데기뿐이다. 이제 자동차는 바퀴 달린 전자제품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0년 후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살아남을 기업을 예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득권이 사라진 시장에서 성장은 사치다.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전략이자 목표다. 대규모 신규 투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현대차호가 마주한 두 번째 태풍은 대한민국 안에 존재하는 지역풍이다. 좀처럼 바뀌지 않는 기업 규제가 그것이다. 기업은 지속적으로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요구받고 있다. 기업은 대양을 항해할 배를 만드는 데 돛의 개수와 갑판의 넓이 그리고 배의 높이와 닻의 무게를 획일적 기준에 맞춰야 한다. 순환출자 금지 원칙 같은 것이 단적인 예다. 지주회사는 최선의 지배구조로 여겨지며, 그 전환 과정에서 최대주주는 철저한 감시 대상이 된다. 배의 본질은 안전하고 빠른 항해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수용하고 맞추지 않으면 배는 출항조차 할 수 없다. 긴 고민 끝에 현대차호는 두 개의 태풍을 모두 이겨낼 배를 만들고 출항 준비를 마쳤다. 순환출자를 풀고 IT 투자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모비스 중심의 그룹을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부두를 떠난 거선은 적선을 마주하게 됐다.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다. 엘리엇은 최근 5년간 50번 출몰해 49번의 공격에 성공했다. 제너럴일렉트릭(GE), 애플, 포드, US스틸 모두 엘리엇의 희생양이 됐다. 지난 2년간 애플은 엘리엇 공격에 대한 방어를 위해 2000억달러(약 216조원)를 썼다. 배당과 자사주 매입을 위한 것이었다. 1% 남짓한 엘리엇 지분율이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소수주주를 위한 제도와 폴 싱어 회장의 심리전 때문이다.
엘리엇은 현대차라는 거선이 대양을 안전하고 끝까지 항해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목표는 오로지 수익이다. 엘리엇 공격에 현대차호는 항해에 필요한 연료와 양식 그리고 부품과 공구들을 넘겨야 한다. 보유한 현금을 투자가 아니라 배당에 써야 하며 그가 추천한 이사를 선임해야 하는 것이다. 현대차호에는 포이즌필이나 차등의결권 같은 구명선도 없다. 이런 장치 없이는 역풍을 거슬러 전진할 수 없다.
여기에 또 다른 역풍인 상법개정안이 국회에서 검토되고 있다. 그중 집중투표제는 작은 지분으로도 세 배, 네 배의 승수 효과를 낼 수 있는 엘리엇의 선호 아이템이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과 다중대표소송제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검은 구름 가득한 폭풍전야의 수평선을 마주한 현대차호에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한번 해 보겠다는 도전 정신보다는 이것저것 마음대로 해 볼 수 있었던 창업자 시절의 시대적 환경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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