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샤자한'의 왕비 무덤 '타지마할'
사방 완벽한 대칭… 22년에 걸쳐 만들어져
샤자한이 유폐된 야무나 강변의 '아그라성'
창살 너머 타지마할이 안개속에 가물가물
내·외부 조각과 문양에 감탄사 절로 나와
악바르 대제가 만든 수도였던
붉은 사암의 '파테푸르 시크리' 성
힌두교 이슬람 등 건축양식 공존
수많은 제약 속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가는 현대인의 삶. 그리고 그 짜증나는 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수많은 사람.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의 삶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 위해 여건만 허락한다면 어디론가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래서 요즈음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이 바로 거대한 신비의 땅 인도가 아닌가 한다. 지금껏 여러 부류의 사람이 꿈을 안고 이 인도 대륙을 다녀왔고, 또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서 방황하면서 고독한 여행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요즈음 들어서는 여행사 패키지 상품으로도 등장해 불교 성지 순례를 비롯한 많은 단체 관광이 이뤄지는 것을 보면 여행하기가 힘들다고 해서 일반인에게 멀게만 느껴지던 인도 대륙도 어느 틈엔가 성큼 대중 앞에까지 다가서 손짓하고 있다.
북인도의 자랑 타지마할과 아그라성
드넓은 땅덩어리에 비례하는 이상으로 볼거리의 천국인 인도 대륙. 그 모든 것을 단숨에 섭렵하려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행을 마칠 때쯤 해서 스스로가 어리석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본인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장기 여행을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도 대륙의 오묘함을 뭐라고 말한다는 것에 자신이 없다. 정말 심오한 철학이 있는 곳인지 종교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 아니면 미개인들이 제멋대로 살아가는 지저분한 곳인지. 그만큼 인도의 가장자리만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흔히 인도를 ‘불가사의한 땅’이라고도 표현하면서 앞다퉈 인도로 향한다.
볼거리의 천국인 이 인도 대륙에서 자유 여행을 즐기는 배낭족이든 여행사 패키지 상품에 맞춘 단체여행단이든 간에 공통적으로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 몇 군데 있다. 그중 하나가 북인도의 아그라인데, 그 유명한 ‘타지마할’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아그라는 델리에서 야무나강을 따라 약 200㎞ 내려온 곳에 있는 지방 도시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곳은 과거 이슬람의 대제국이었던 ‘무굴제국’의 중심인 곳으로 그 영화의 흔적이 오늘날 구시가 일대와 근교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인류가 지상에 남긴 최고의 예술품이라고 말하는 하얀 대리석이 눈부시도록 빛나는 타지마할은 물론이요, 붉은 사암의 거대한 성채 ‘아그라성’과 그 내부의 화려한 궁전, 그리고 절대 권력의 위대한 힘을 말해주는 ‘파테푸르 시크리’ 등이 바로 그런 곳이다.
샤자한 왕비의 무덤인 위대한 건축물 타지마할
인도 대륙 가는 곳마다 우글거리는 ‘릭샤’라고 불리는 자전거 택시를 타고 타지마할을 찾아 골목길을 달린다. 붉은 사암으로 멋들어지게 지어진 정문의 건축미에 벌써부터 압도당한다. 그 웅장한 정문의 아치를 빠져나가자마자 타지마할의 눈부신 모습이 눈 안 가득히 들어온다. 아, 이게 얼마 만인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감격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소 흥분된 모습으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때의 느낌을 나는 여행일지에 다음과 같이 짤막한 메모를 남겼다. ‘오늘 나는 타지마할을 실제로 봤다. 이것은 내가 세계 최고의 건축미를 간직하면서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하는 타지마할이 인도에 있다는 말을 처음 듣게 된 지 근 30년 만이다.’
사방 어디에서 봐도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이 타지마할은 워낙 유명한 곳이기에 이곳에 와보지 않고서도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렇지만 그 현장에 서서 무굴제국의 황제였던 샤자한의 슬픈 사연과 왕비에 대한 그 사랑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것이 이곳까지 찾아온 보람을 느끼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마할’이라는 것은 ‘궁전’이라는 말이지만 이 타지마할은 궁전이 아니라 샤자한의 왕비 뭄타즈 마할의 이름을 딴 왕비의 무덤이다. 그러니까 22년간에 걸쳐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서 지은 이 건축물이 인간이 그곳에 살기 위해서거나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죽은 왕비 개인에게 바쳐진 초호화 무덤이라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죽은 왕비의 영혼이 완성돼가는 이 자신의 호화스러운 무덤을 보고 기뻐했을지는 몰라도, 이것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백성의 피와 땀의 손실이 따랐겠는가. 이로 인해 결국 그 강성한 무굴제국도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 또 왕비를 잃은 슬픔에만 잠겨 국정을 돌보지 않던 샤자한 자신도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감옥에 갇혀 지내다가 사후에는 이 타지마할의 왕비 곁에 나란히 안장됐다. 그러니까 타지마할의 건설은 왕비의 주검을 안락하게 지내도록 지은 것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무덤도 되고 말았으며, 연일 몰려드는 구경꾼 때문에 편히 잠들어 있지도 못하고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한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슬람과 힌두 문화의 융합이 만들어낸 걸작
뒤편으로 야무나강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맨발로 대리석 위를 걷는 기분이 상쾌했다. 어디 흠잡을 곳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전망이 좋아보이는 곳에 펑퍼짐하게 앉아 쉬고 있는 남녀 한 쌍의 눈에 익은 듯한 얼굴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역시 같은 한국인이었다. “인도에 오신 지 얼마나 됐습니까?” “예, 저희들은 1년쯤 쭉 남인도를 돌아다니다가 얼마 전 이곳으로 올라왔어요. 그런데 이렇게 입장료를 비싸게 주고 들어온 곳은 처음이기 때문에 오늘은 아무 데도 안 가고 이곳에 이렇게 죽치고 앉아서 하루종일 이 타지마할만 쳐다보기로 했습니다.” 참 재미있어 보이는 이 두 사람은 오랜 인도 여행으로 인해서인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반쯤 인도인 모습이 됐다고나 할까. 그래도 이 자유스러운 인도가 마냥 좋다고 한다. 어쩌면 입장료는 핑계에 불과하고 이 환상적인 예술품 타지마할에 매료돼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보름달빛 아래에서 이 타지마할이 가장 멋있다고 하던데 며칠 더 있으면 보름이니까 그때까지 기다려볼 것인가요?” “아이고,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겠어요! 또 밤에는 입장료를 따로 받는데 그것도 엄청나게 비싸잖아요. 포기하는 거죠 뭐.”
이곳 아그라에서 무굴제국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시절은 샤자한 이전의 악바르 대제 때다. 타지마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야무나 강변에 동화의 세계처럼 멋들어지게 서 있는 아그라성도 악바르 대제에 의해 1565년 설립됐으며 무굴제국의 권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해자를 건너 몇 겹의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게 돼 있는 이 성은 내부에 화려한 궁전, 모스크가 늘어서 있다. 그런데 이슬람 정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양식을 유심히 살펴보면 힌두교 양식이 가미된 곳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외세 문화인 이슬람 문화와 토착 문화인 힌두 문화의 융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의 제왕들은 힌두 문화를 파괴하는 데 앞장섰지만 악바르는 무굴의 번영을 위해서는 힌두의 도움이 필요함을 깨닫고 실천한 인물이라고 하는데 이런 데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비단 이 아그라성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근교에 떨어져 있는 파테푸르 시크리에 가서도 명확하게 나타났다. 그러고 보면 이방인의 정권인 무굴도 서서히 신비의 땅 인도에 동화돼가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그라성에 유폐돼 타지마할을 바라보던 샤자한
아그라성에서 야무나 강을 바라보는 전망이 인상적이다. 멀리 타지마할이 희미한 안개 속에서 가물거린다. 이 성내에는 샤자한이 유폐돼 갇혀 있었던 탑이 있다. 자신을 제거한 아들에게 부탁한 그의 마지막 소원이 타지마할을 보면서 죽도록 해달라는 것이어서 그 소원을 들어줬다고 한다. 감옥의 창살 너머로 아득하게 타지마할을 바라보고 있을 샤자한을 상상하니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그라를 찾았을 때 또 하나의 볼거리는 악바르 대제의 유산인 파테푸르 시크리다. 그러니까 아이러니하게 힌두의 고장 인도에 와서 계속 이슬람 문화에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한 성자의 예언에 의해 아들을 얻은 악바르는 그 성자의 말을 듣고 근교의 파테푸르 시크리에 도성을 쌓아 왕궁과 거대한 모스크를 짓고 수도를 그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곳은 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14년 만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다시 아그라성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됐다. 그래서 그 엄청난 규모의 유적들이 별로 사용한 흔적조차 없이 들짐승의 놀이터로 버려지게 되면서 오늘날까지도 강한 햇빛 아래서 침묵만을 지켜오다가 구경거리가 된 것이다. 참 엄청난 낭비요 과실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것은 절대권력에서나 용납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모스크의 거대한 불란드 문 앞의 계단에 앉아 발밑으로 펼쳐지는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면서 볼거리에 지치고, 입에 맞지 않는 음식에 지치고,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치근대는 잡상인에게 지친 심신을 달래본다.
아그라=글·사진 박하선 여행작가 hotsunny7@hanmail.ne
여행메모
한국에서 인도로 가는 항공편은 다양하다. 아시아나항공이 수도인 델리로 직항한다. 인도 국적기인 에어인디아도 주 5회 인천공항에서 델리 인디라 간디공항까지 운항한다. 인도는 한국에서 비자를 받아야 입국할 수 있다. 2014년 4월부터 인도 도착 공항에서 비자를 간소하게 받을 수 있는 비자협정국가에 한국이 포함돼 전자비자를 받아 간편하게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전자비자 발급 비용은 49달러다. 워낙 넓은 인도이기에 지역마다 최적기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지역은 겨울철이 여행 적기다. 가장 여행을 피해야 할 시기는 4~7월. 한낮의 온도가 50도에 육박하는 지역이 많기 때문이다. 최적기는 11~2월이며 3월부터 힌두력의 새해가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더워지기 시작한다. 7~8월은 몬순 시즌으로 비가 많이 온다.
인도 사람들은 상당히 사교적이어서 누구에게나 말을 걸기 좋아한다. 특히 외국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처음 걸어오는 말은 당연 ‘어디에서 왔는냐?’ 하는 것이지만 그다음부터의 질문이 문제다. 먼저 이름을 묻는다. 뭐라고 대답하면 계속해서 아버지, 어머니, 배우자, 삼촌, 동생, 친구 이름을 묻고, 심지어 이웃집 사람의 이름까지도 뭐냐고 묻는다. 처음 멋모르는 사람은 순진하게 대답해주는데 결국 계속되는 질문에 기가 질리고 만다. 내 이름 알았으면 됐지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주변 사람 이름까지 알아서 무엇하겠다는 건가? 신원조회라도 하겠다는 건지 원. 만나는 사람마다 계속되는 이름 질문에 짜증만 날 뿐이다. 아마 이것은 사람을 사귈 때 그들의 습관일 것이다. 여러 번 당한 나는 다음부터 역공세를 폈다. 누가 나에게 접근해오면 내가 먼저 그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들처럼 질문할 기회를 주지 않고 이름 공세를 폈다. 그러니까 결국 빙긋이 웃더니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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