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이랑'과 '고랑'의 차이

입력 2018-06-04 09:01  


이랑은 두둑과 같은 말이다. 논이나 밭을 갈아 골을 타서 두두룩하게 흙을 쌓은 곳이다. 고랑은 두둑한 땅과 땅 사이의 길고 좁게 들어간 곳을 이른다.

지구 온난화로 기온이 올라가자 덩달아 모내기 철도 빨라졌다. 농촌진흥청에서 나서서 지나치게 이른 모심기는 수확량 감소로 이어진다고 걱정할 정도다. 원래 우리 선조들은 이맘때 까끄라기 곡식, 즉 익은 보리를 베고 벼농사를 짓기 위해 모를 심었다. 그래서 절기상 망종(芒種·6월6일)이라고 한다. 까끄라기 망(芒), 씨 종(種)이다. 까끄라기란 벼, 보리 따위의 낟알 껍질에 붙은 깔끄러운 수염을 말한다. 한 해 먹거리를 준비하는 시기이니 1년 중 농사일로 가장 바쁜 때다.

고랑은 오목한 골, 이랑은 볼록한 두둑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조선시대 문신인 약천(藥泉) 남구만(1629~1711)이 운치 있게 읊은 이즈음의 농촌 풍경이다. 동트는 시골 아침의 고즈넉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권농가(勸農歌)로 잘 알려진 이 시조에 나오는 ‘재’는 ‘높은 산의 고개’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서울의 무악재, 만리재, 충북 제천의 박달재 같은 게 유명한 고갯길이다. 경북 문경시와 충북 괴산군을 잇는 고개는 새재라고 부른다. 지명을 넣어 문경새재로 많이 알려져 있다. 재를 한자어로 하면 ‘영(嶺)’이다. 그래서 새재를 ‘조령(鳥嶺)’이라고도 한다. 흔히 영남지방이니, 강원도 영동/영서니 할 때의 ‘영’이 이 ‘재’를 이르는 말이다. ‘재/영’이 지역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경상남북도를 이르는 영남(嶺南)은 조령의 남쪽이라는 뜻에서 연유한 말이다. ‘영동지역’ ‘영서지역’이란 말은 대관령을 기준으로 삼았다. 대관령의 동쪽이냐 서쪽이냐에 따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사래’도 잊혀 가는 정겨운 우리말이다. 사래는 이랑의 옛말이다. 밭의 한 두둑과 한 고랑을 아울러 이르기도 한다. ‘사래 긴’이라는 것은 이랑이 길다는 것으로 밭이 넓다는 뜻이다(네이버 지식백과).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랑의 길이’를 뜻하는 북한말로 처리하기도 했다. 사래는 이랑, 고랑과 함께 쓰는 말인데 단순히 북한말로 처리한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고운 ‘ㄹ’음 우리말, 일상에서 자주 쓰길

‘이랑’과 ‘고랑’을 헷갈려하는 경우도 많으니 구별해 써야 한다. 이랑은 두둑과 같은 말이다. 논이나 밭을 갈아 골을 타서 두두룩하게 흙을 쌓은 곳이다. 물결처럼 줄줄이 오목하고 볼록하게 이루는 모양을 말하기도 한다. 이랑은 한자어로 하면 경(頃)이다. 인생살이를 얘기할 때 흔히 비유하는 말 ‘만경창파(萬頃蒼波)’에 이 이랑이 쓰였다. 직역하면 ‘만 이랑의 푸른 물결’이란 뜻으로, 한없이 넓은 바다를 묘사하는 말이다.

이에 비해 고랑은 두둑한 땅과 땅 사이의 길고 좁게 들어간 곳을 이른다. 이랑과 헷갈릴 때는 고랑의 어원이 ‘골(골짜기)’이란 점을 떠올리면 된다. 밭농사를 지을 때는 두둑한 이랑에 작물을 심고, 고랑엔 물을 댄다고 이해하면 외우기 쉽다.

사래나 이랑, 고랑은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 아름다운 순우리말이다. 공통적으로 ‘ㄹ’이 들어 있는 게 눈에 띈다. ‘ㄹ’은 국어의 자음 가운데 유음(流音)을 표기하는 데 쓰이는 글자다. 울림소리이면서 굴림소리라 부드럽다. 작고한 한글학자 정재도 선생은 “우리말에서 ‘ㄹ’이 가장 많이 쓰이는 닿소리(자음)이자 우리말 소리 가운데 가장 변화가 많은 소리”라고 했다(《우리말의 신비 ‘ㄹ’》). 그는 얼, 말, 글 등 우리 겨레의 바탕이 되는 낱말에는 ‘ㄹ’이 있음을 주목하고 이를 우리 겨레와 끊을 수 없는 특별한 소리라고 강조했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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