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여섯 개의 사건. 연결 고리는 없다. 하지만 개별 사건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며 압도적이고 거대한 ‘고통’이 사건 사이를 넘나들었다. 파격적 설정들도 도움이 됐지만 그 이상의 정교한 연출력이 힘을 발했다.
지난달 30일 국립극단이 서울 청파로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막을 올린 ‘2센치 낮은 계단’(사진) 얘기다. 연출은 극단 달나라동백꽃의 대표 부새롬이 맡았고 배우 마두영, 백석광, 김정, 신정원, 조재영, 노기용이 연기한다. 이 작품은 처참하게 살해당한 피해자를 가족으로 둔 여섯 인물이 복수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복수’라는 공통분모는 있지만 사건은 전혀 중첩되지 않고, 여섯 명은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한다.
여러 사건을 한 무대에서 다루다 보면 자칫 구심점을 잃고 흩어져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기존 복수극에서 중심이 됐던 서사보다 극심한 상실감과 복수심이라는 인물들의 심리 자체에 집중하면서 이를 극복했다. 배우들의 역할을 자유자재로 바꾼 연출 기법이 큰 도움이 됐다. 피해자 가족으로 고통에 휩싸인 연기를 하던 인물이 다른 사건에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 명의 가해자 목소리를 내는 식이다. 분절적인 사건이지만 이 기법이 반복되면서 마치 연결돼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충격적인 오프닝을 통해 시작부터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극은 각자 얼굴에 검은 봉지를 쓴 채 고통에 울부짖고 서로를 공격하며 시작된다. 고통의 깊이는 물론 누군가를 원망하며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한 번에 잘 드러낸 파격적 장면이었다. 삼면의 무대를 적극 활용한 점도 눈에 띄었다. 하나의 사건이 끝날 때쯤 다른 사건의 인물들이 여러 방향에서 튀어나오고, 또 사라지면서 관객들의 시선을 빼앗고 이야기를 새롭게 끌고 나갔다.
다만 극단적 복수심으로 빚어낸 언어적 폭력성이 지나치게 반복돼 아쉬웠다. 각 인물은 가해자에게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하는 상상을 하며 이를 말로 드러낸다. 극의 흐름상 반드시 필요한 장면들이긴 하다. 하지만 언어적 폭력성이 계속 반복되면서 오히려 반감이 살짝 들기도 했다. 오는 18일까지.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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