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영웅들, 청년들이여 깨어나라> 출간
독립운동가 묘소 발굴해 지정작업
시작은 평범했다. '9월29일 유관순 여사 서거'. 페이스북에 누군가 올린 이 글을 보면서 군인인 20대 청년은 머리 속에서 이름을 꺼내기 시작했다. 안중근, 유관순, 윤봉길…. 누가 있더라? 이상했다. 독립운동가 이름 20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역사공부 한것도 아니고, 사학과 전공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 모르는 게 정상이지' 여기서 끝났다면 이 긴 얘기는 2015년부터 시작되지도 않았다. 이 청년은 입고 있는 군복을 부끄러워했고,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업적을 모아보겠다고 애플리케이션(응용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간단한 앱에서 시작된 일은 독립운동가들에 관한 책을 내는 걸로 일이 커졌다. 이제는 클라우드 펀딩을 받아 지금은 현충원에 안장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산재 묘소를 발굴하는 일을 하고 있다. 캠페인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회공헌기업 포윅스 대표를 맡고 있는 정상규(사진·31) 작가 얘기다. 말이 작가지 그의 일상은 들여다보면 산에서 산삼을 캐려는 심마니나 다름없다. 전국 방방곡곡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다니고 후손들을 수소문해 그들의 업적을 조사한다. 산으로 들로 묘소를 찾아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길을 내고 안내문을 만드려면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지방자치단체와 보훈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온갖 서류작업과 돈이 필요하다. 비용은 클라우드 펀드와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모은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이게 그의 일상이다. 최저임금과 월급 보다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일을 위해 뛰고 있다. 최근에 내놓은 <잃어버린 영웅들>이라는 책이 팔리면서 받는 인세와 간간히 들어오는 강의로 버틴다. 그는 '헬조선', '이민가고 싶다'는 말들을 수치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지켜내고 이루어낸 국가인지 안다면 젊은이들이 국적을 바꾸겠다는 말을 저리 쉽게 하겠습니까? 나라를 떠날 생각을 하기 전에 나라를 잃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이 안 나옵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애쓴 독립운동가 묘소를 현충일이 아니더라도 단 한번 이라도 찾아보고, 그 후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미국에서 꿈을 찾으려던 시절이 있었다. 미국 오리곤 대학에 진학해 수학과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20대 초반. 그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대학원 진학까지 앞두고 있었다. 유학비결을 알려주는 책까지 내면서 교내 유명인사가 됐고, 미국생활에 도취됐다.
"유학생들에게 '유학을 잘 마무리하고 대한민국에 보탬이 되자'고 얘기해놓고 정작 제 자신은 미국에 빠져 있었습니다. 영주권도 있는 상태였으니까요. 그러던 중 부모님의 병환 소식을 듣고 영주권이건 대학원 진학이건 모두 포기하고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공군장교로 자원입대하고 복무하던 중에 독립운동가분들과의 인연이 시작된 겁니다."
정 작가는 그렇다고 역사문제와 보훈문제를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접근해 '보훈문화'를 만들고 싶어한다. 이러한 일들은 국가에만 의존하기 보다는 중요성을 깨달은 누구라도 실천하자는 주장이다. 민간차원에서 시작한다면 국민들의 정서적인 반발도 적으면서 또다른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국가관이나 보훈관, 영웅 만들기는 시대에 맞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보훈문화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은 독립운동가를 찾아내고 자료 조사를 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찾아낸 독립운동가 역시도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잊혀지고 숨겨진 독립운동가 분들을 찾다보니 고정관념부터 바꿔야겠다 싶었습니다. 소수의 뛰어난 능력을 가진사람들만이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우리가 사회적 약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앞에 나서고 위인전에 나오는 독립운동가들의 뒤에서 밥해주고 빨래주던 분들도 엄연한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합니다. 출신, 직업, 좌익 계열 여부, 월북 여부, 활동지역 등 여러가지 이유로 조명받지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
정 작가는 지난해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라는 책을 내놨다. 베스트셀러가 되고, 독립운동사 후손들과 보훈 관계자들의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또 영웅들을 알게 되고 <잃어버린 영웅들, 청년들이여 깨어나라>를 출간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나라와 동포, 독립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진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담았다. 역사의 흐름에서 개인의 선택이 역사의 선택이 된 24명의 이야기들이다.
나라를 잃고 그야말로 '헬조선'도 아닌 '조선' 조차 없던 시대였다. 그는 책에서 시대상황에서 독립운동이라는 선택을 한 사람들은 평범한 청년들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영웅'의 이야기가 아닌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오다 독립운동을 하게 된 배경과 활동들이 담겨 있다. 인물 뿐만 아니라 기업의 이야기도 담았다. 유한양행, LG그룹, GS그룹, 효성그룹, 교보생명, 동화약품, 자생한방병원 등 막연하게 알던 창업주들의 독립운동도 써냈다.
정 작가는 일제 강점기 시절 북촌, 성북동, 혜화동에 한옥마을을 건설한 정세권 선생을 소개했다. 건축으로 독립운동을 한 정 선생은 경남 고성군 하이면에서 면장을 지냈다. 하지만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면장직을 사임하는 선택을 한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빵집에서 배달일을 하면서 허기를 채워 돈을 모았다. 그렇게 설립한 회사가 부동산 개발회사인 '건양사'다. 북촌지역의 땅과 한옥을 사면서 매년 300채의 한옥을 지었다. '일본 주택은 절대 지을 수 없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을 못붙이게 해야한다 ' 등이 선생이 남긴 말이다.
한옥마을로 데이트를 떠나면서 '일제시대 거치면서도 어떻게 한옥이 그대로 남아있지?'라고 자문해본 청년들은 얼마나 될까? 조그마한 관심과 의문이 있다면 우리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게 독립운동가의 손길이라는 게 정 작가의 얘기다.
"저도 사실 사명감이 강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후손분들과 얘기하고 밥을 먹으면서 사명감이 더해졌습니다. 저는 지금 젊은이들이 보훈에 대한 정신이 부족하다고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디선가 자신의 열정이나 재능을 보훈에 관련된 일에 쓰고 싶다는 막연한 마음이 있는 청년들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지금 선택하고 실행하자. 100년 전 그들도 그랬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강조했다. "공훈이 인정되려면 현 보훈법상 '뚜렷한 업적'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의 희생양이 여성 독립운동가라고 봐서다. 수백명의 가사일을 돕고 정신적으로 힘을 주셨던 어머니들도 평범해보이지만 영웅이라는 얘기다. 총을 들고 적을 사살하지 않았다고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기준이 원망스럽다고 정 작가는 털어놨다.
의병장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시아버지, 대한독립단원으로 감옥에서 서거한 아들, 독립운동으로 피살된 사돈까지…. 이 한가운데 있는 여성이 독립운동가가 윤희순 선생이다. 그는 의병부대 내 여성 의병단장을 맡았다. 의병대들의 취사와 세탁을 마고 의병들의 교육도 앞장섰다. 12편의 의병가를 지었는데 이 중 여성을 위한 <안사람 의병가>는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우리나라 의병들은 나라찾기 힘쓰는데 우리들은 무얼할까... (중략) 의복 버선 손질하여 만져주세. 의병들이 오시거든 따뜻하게 만져주세. 조선아낙네들도 나라없이 어이살며. 힘을 모아 도와주세(후략)'
"독립운동가 산재묘소를 막상 찾으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그 묘소들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가족묘보다도 관리가 안되고 있어서입니다. 독립운동가 대부분은 가족들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후손들이 제대로 남아있을리 없고 묘지들이 정리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시대적 상황이 그렇다보니 사망해도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묻어버린 묘들도 많습니다."
정상규 작가는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100년 전 청년들이 한번의 선택으로 독립운동가가 된 것처럼, 자신도 '소중한 가치를 지키자'는 선택을 한 사람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책에 남긴 사인처럼 과거를 찾고 있는 그에게서 미래가 보였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가능성입니다."
김하나 한경닷컴 기자 ha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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