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노사가 알아서 하라"는 週 52시간 '황당' 가이드라인

입력 2018-06-11 17:53  

고용부, 시행 직전 부랴부랴 내놨지만…

근로시간 판단 모호한 해석
오히려 산업현장 혼란 키워

워크숍은 일이고 회식은 아니다?
"결국 법원 가서 해결하란 얘기"

헷갈리는 근로시간 단축 가이드라인

지시받은 휴일 접대 골프는 근로…흡연·식사 시간도 근로시간?
임원은 주52시간 적용 대상?…기준 너무 모호해 기업 혼란

정부, 달랑 A4 한장 실태조사
노사갈등 부를 매뉴얼 상당수



[ 백승현/좌동욱 기자 ] 정부가 부랴부랴 근로시간 단축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제도 시행을 고작 20일 앞두고서다. 가이드라인의 핵심 내용은 ‘사용자의 지휘·감독을 받는 모든 시간은 기본적으로 근로시간이지만, 개별 사업장·근무형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현장의 아우성에 뒤늦게 가이드라인을 내놨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헷갈린다는 반응이다.

고용노동부는 1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근로시간 단축 관련 브리핑을 하고 ‘근로시간 해당 여부 판단 기준 및 사례’를 발표했다. 김왕 고용부 근로기준정책관은 “근로시간이라 함은 근로자가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 종속돼 있는 시간”이라며 “다만 개별 사업장 상황이나 근로자의 근무 형태에 따라 명확한 구분은 어렵다”고 말했다.

고용부는 기업들이 헷갈려하는 휴게시간과 대기시간의 구분은 사용자의 지휘·감독 여부, 교육시간은 강제성 여부가 근로시간 여부를 가른다고 했다. 출장과 관련해서는 통상적으로 근로시간이지만 출장 전 취업규칙 등을 통해 사전에 정해둬야 한다고 권고했다. 접대는 사용자의 지시 또는 승인이 있으면 근로시간으로 판단했다.

고용부가 가이드라인을 내놨지만 산업현장은 더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구체적인 항목마다 기준이 너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 행정해석과 판례 등을 모아놓은 수준이라 구체성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노사가 알아서 근로시간을 정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법원으로 가라는 얘기”라고 지적했다.


고용노동부가 11일 발표한 근로시간 단축 가이드라인을 두고 “턱없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에는 고용부의 안이한 현실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영주 고용부 장관은 이날 오전 ‘긴급 주요 기관장회의’를 열고 “300인 이상 기업 중 조사를 마친 2730곳 가운데 594곳(21.8%)이 인력 충원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상당수 대기업이 근로시간 단축에 잘 대비하고 있어 문제가 없다는 발언이다.

이에 대해 기업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고용부의 조사는 지난달 말부터 300인 이상 기업을 대상으로 팩스, 전화를 통해 이뤄졌다. 질문 항목은 단 3개였다. 근로시간 단축과 관련해 준비를 하고 있는지(근무제 변경 또는 유연근무제 도입 여부, 인력 신규 충원 여부 등), 임금보전 방안이 있는지, 애로사항이 있는지 여부다. 준비상황을 묻는 질문은 A4용지 한 페이지였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근로시간 단축의 핵심 사항인 유연근무제, 교대제 개편 등은 노사협의 또는 동의가 필요한 문제여서 사측의 답변은 큰 의미가 없다”며 “현장의 혼란에 비해 고용부의 판단이 너무 안이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근로시간 판단은 사용자 지휘 여부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근로자가 사용자의 지휘·감독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은 ‘휴게시간’으로, 근로시간이 아니더라도 자유로운 이용이 어려우면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 있는 ‘대기시간’, 즉 근로시간으로 인정된다. 아파트 경비원의 야간 휴게시간을 자유로운 이용이 보장되는 휴식·수면시간으로 보기 어렵고 긴급 상황에 대비하는 대기시간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는 대법원 판례가 근거로 제시됐다.

교육시간과 관련해서는 강제성이 근로시간 여부를 판단한다고 했다. 사용자가 의무적으로 하도록 돼 있는 각종 교육에 참가하는 것은 근로시간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근로자가 개인 차원에서 법정 의무 이행에 따른 교육을 받거나 이수가 권고되는 정도의 교육을 받는 것은 근로시간이 아니다.

출장의 경우는 사전에 노사가 합의할 것을 권고했다. 출장 시 장시간 비행, 출입국 수속, 이동 등에 걸리는 시간 등도 노사 간 합의로 정하는 것으로 했다.

회식시간은 기본적으로 근로시간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김왕 고용부 근로기준정책관은 “통상적으로 회식은 노무 제공과는 관련 없이 사업장 내 구성원의 사기 진작, 조직 결속 및 친목 등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임을 고려할 때 근로시간 인정이 어렵다”며 “상사가 참석을 강제하는 언행을 했다고 해도 근로계약상 노무 제공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노사 갈등 부를 매뉴얼”

고용부는 “모든 상황을 정부 지침으로 정리할 수 없다”고 뒤로 빠졌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헷갈린다. 가령 휴일에 고객과의 접대골프는 근로시간인지, 흡연이나 식사시간은 어떻게 되는지, 임원은 근로시간 단축 대상인지, 회사 워크숍도 근로시간으로 봐야 하는지 등은 모호한 영역으로 남겨뒀다.

고용부는 휴일 골프·식사 등 접대와 관련해 사용자의 지시 또는 최소한의 승인이 있으면 근로시간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접대 업무가 건별로 지시가 내려지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휴일 골프 등은 미리 노사가 정해놓지 않는 한 법원 다툼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근무 중 흡연이나 점심식사 시간도 마찬가지다. 고용부는 사용자의 지휘·감독 여부에 따라 근로시간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다고 하지만 흡연·식사 중 상사로부터 전화를 받고 즉시 응대가 가능하면 근로시간, 그렇지 않으면 휴게시간으로 인정될 수도 있다는 것이어서 혼선이 예상된다.

임원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근로자로 보기 어렵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사업경영에 대해 등기이사와 동등한 수준의 업무집행권과 의결권을 보유·행사한다’는 단서조항이 있어 이 역시 법원에서 판결이 날 문제라는 지적이다.

워크숍이나 세미나의 경우도 판단이 쉽지 않다. 가이드라인은 ‘사용자 지휘·감독하에 있는 세미나는 근로시간이지만 행사 도중 친목 도모시간은 근로시간이 아니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워크숍을 하는 이유가 직원 단합과 교육인데 두 가지를 명확히 구분하기 쉽지 않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기업들이 원한 것은 정부가 근로감독을 어떤 기준으로 할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었다”며 “이 정도 수준의 매뉴얼은 노사 갈등만 불러와 시간과 비용 모두 기업 부담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백승현/좌동욱 기자 arg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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