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의 데스크 시각] 주 52시간과 갤럭시 신화

입력 2018-06-1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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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호 산업부장


[ 이건호 기자 ] “자네, ‘노는 것’과 ‘쉬는 것’의 차이를 아나? 돈이 없으면 놀 수 없지. 집에서 쉬는 수밖에….”

대기업 총수답지 않은 서민적인 모습으로 생전에 숱한 일화를 남긴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한 말이다. 다른 사업을 하기 위해 LG를 떠난 인재가 실직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복직 기회를 주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였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느냐”는 질문에 “좀 놀았다”고 답하자 구 회장은 이렇게 받아쳤다고 한다. 복직에 성공한 이 인사는 “궁핍해진 내 처지를 꿰뚫어보는 것 같아 뜨끔했다”고 털어놨다.

정부가 근로시간 단축(주 52시간 근무)을 추진한 배경에는 ‘저녁 있는 삶’이 있다. 근로자들을 잦은 야근·특근에서 해방시켜 저녁 시간을 돌려주겠다는 ‘선한’ 취지를 놓고서는 별 이견이 없다. 줄어드는 근로시간을 때우기 위해 기업들이 일자리를 늘릴 것이라는 기대도 담겼다.

돈없는 저녁은 행복할까

하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고 했던가. 현장 분위기는 정부 기대와는 딴판이다. 기업들은 신규 채용보다는 생산성 향상과 공장 자동화, 업무 외주화 쪽에 집중하고 있다. 경기 침체와 기업 활동을 옥죄는 각종 규제 탓에 경영 환경이 녹록지 않아서다.

일부 중소기업은 최저임금 인상에 근로시간 단축까지 겹쳐 생존 자체가 힘들어질 것이라고 토로한다. 300인 미만 기업(50~299인)은 2020년 1월부터 주 52시간제가 적용되는 만큼 시간이 있는 게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 대기업 협력사들은 “모르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납품처의 근로시간과 작업 일정에 맞춰야 해서다. 임금이 깎이게 된 이들은 청와대 게시판에 ‘누구를 위한 주 52시간인가’라는 글을 올리고 있다.

글로벌 무대에서 뛰는 대기업도 사정이 다르지는 않다. 삼성전자는 1~3년 걸리는 휴대폰과 TV 신제품 개발 주기를 3~6개월 늘리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근로시간 단축에 대응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그만큼 글로벌 ‘속도 경쟁’에서 뒤처질 게 뻔하다.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S9 소프트웨어 개발자 1000여 명은 제품 출시(2018년 3월)를 앞두고 지난해 11월부터 4개월간 일요일만 빼고 매일 밤 12시까지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애플이 아이폰이라는 혁신 제품을 들고나왔을 때 빠른 추격으로 대항마 위치에 오른 기업은 삼성뿐이다. 타이밍을 놓쳤다면 삼성의 휴대폰 사업은 노키아 꼴이 났을지도 모른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건설사들 사이에선 해외 수주 급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해외 플랜트 공사 등에서 한국 기업 특유의 강점인 공사기간 단축이 사라지면 수주 경쟁력을 잃을 것”(H사 K부회장)이라는 지적이다.

근로시간 단축을 앞두고 벌어지는 난맥상을 보면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고용노동부가 얼마 전 내놓은 주 52시간제 가이드라인(노동시간 단축 가이드)은 행정해석과 판례를 모아 놓은 수준이어서 “도움이 안 된다”는 게 기업들 불만이다. ‘노사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는 분쟁의 불씨만 키울 소지가 다분하다. 근로시간 적용의 예외인 특례업종을 한꺼번에 26개에서 5개(육상·수상·항공운송·운송 관련 서비스·보건업)로 줄일 때부터 ‘예고된 혼란’이었다.

‘휴식이 있는 삶’이나 ‘일과 생활의 균형’도 중요하지만 고용은 늘지 않고 근로자의 실질 소득이 줄어들며, 한국 산업의 경쟁력이 훼손된다면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반문할 수밖에 없다. 돈 없이 ‘쉬는’ 사람보다는 여유 시간을 즐기면서 ‘노는’ 사람이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leek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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