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 강국' 러시아, AI·빅데이터·로봇산업 한국과 '찰떡 궁합'

입력 2018-06-25 16:34  

사이언스

러 자문 받은 中企 '자율車의 눈'
구글 기술보다 앞선다는 평가

푸틴, 2년 내 1.7조 투자
러시아판 실리콘밸리 조성
1000개 하이테크 기업 유치나서



[ 박근태 기자 ]
삼성전자는 2008년 통화 잡음을 획기적으로 낮춘 휴대폰을 선보였다. 러시아군이 사용하는 통신장비와 레이더에서 불필요한 잡음을 제거하는 기술을 활용했다. 이보다 앞서 1995년 등장한 김치냉장고는 러시아의 원천기술과 한국의 생산기술이 만나 ‘히트상품’으로 발전한 사례다. 냉장고 뒷부분에 있는 압축기는 큰 부피 때문에 냉장고 소형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는데 러시아 탱크 냉방에 사용되던 ‘열전소재’를 찾아내면서 이런 문제를 해결했다. 에어컨을 돌리면 이슬이 맺는 현상을 막는 기술도 한·러의 합작품이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인공위성을 뜨거운 열로부터 막아주는 단열 도료를 개발했다.

국내 기업들이 내놓은 대표 상품 가운데는 옛 소련 시절을 포함해 러시아에서 개발됐거나 러시아인이 만든 발명품이 적지 않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전차의 캐터필러, 넓은 벌판과 도심의 레일을 조용히 달리는 전기기차, 1980~1990년대 방송을 주도한 비디오테이프리코더, 친환경 태양광 전지판, 하늘을 나는 헬리콥터도 ‘메이드인 러시아’거나 러시아 출신이 내놓은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기초과학 강국 러와 기술 협력 늘어

소련 붕괴 이후 경제난과 서방의 경제 제재로 주춤하던 러시아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기초과학의 든든한 힘을 바탕으로 무인항공기(드론)와 광학레이저, 부품소재, 의료기기 등 과학기술을 활용한 첨단 기술을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최문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구주아프리카협력담당 과장은 “러시아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로봇 등 서방이 주도하던 기술에 도전장을 내며 한국과 협력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눈길을 끄는 건 러시아와 한국의 중소 벤처기업을 중심으로 협력의 틀을 넓히고 있는 점이다. 국내 벤처회사인 레이저옵텍이 2016년 미국 텍사스대 MD앤더슨암센터에 수출한 피부 레이저 치료기도 러시아와의 합작품이다. 이 회사는 창업 초기부터 러시아 전문가를 활용해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러시아는 옛 소련 시절부터 레이저를 이용해 새로운 소재를 연구하거나 핵무기 개발 등에 활용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 기술력을 확보했다. 2020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레이저 시설이 러시아에 들어설 예정이다.

한국전기연구원과 러시아국립광학연구소가 공동 개발한 복강경 시술 장비도 세계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다. 양국 연구자들은 고출력 LED(발광다이오드) 광원과 반도체 레이저를 이용해 빛으로 암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표적 치료할 수 있는 차세대 암 치료 기술을 개발했다. 서울대 의대 연구진 임상 지식과 의료기기 사용 경험, 전기연의 영상의료 기술력, 러시아 원천기술 협력을 바탕으로 의료기기를 공동 개발해 올림푸스, 제너럴일렉트릭(GE), 지멘스 등 글로벌 의료기기 메이커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정상라이다는 러시아의 기술자문과 장비분석을 통해 ‘자율주행차의 눈’으로 불리는 라이다(레이저를 이용한 레이더) 분야에서 구글 자율주행차보다 앞선 장비를 개발한 사례로 꼽힌다.


◆혁신단지 조성, AI 기술 강화 내세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전략적 개발 및 우선순위 프로젝트 대통령 위원회에서 “지금까지 축적된 기술적과 지적 잠재력을 토대로 디지털 경제 발전을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고 이를 상용화해 과학기술 기반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목표다. 2015년부터는 연구개발(R&D) 분야 혁신을 강조한 ‘신산업기술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2020년까지 1조7000억원을 투자해 모스크바 서부 20㎞ 지점에 스콜코보 혁신단지를 짓고 미국 실리콘밸리에 버금가는 혁신단지로 키우려는 계획도 눈길을 끈다. 우주·의료·에너지·정보기술(IT)·원자력 분야에서 1000개 하이테크 기업 유치에도 나섰다. 정택렬 주러시아한국대사관 과학관은 “러시아는 수학, 물리 등 기초 학문이 매우 탄탄하다”며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ICT)을 중심으로 혁신 모델을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러시아의 공통 관심사가 많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강점인 인공지능(AI)과 이미 우주발사체 나로호 개발 과정에서 협력 경험이 많은 우주 분야는 우선적인 협력 대상으로 손꼽힌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말 공개석상에서 “AI 리더가 되는 누구든지 세계를 소유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1일까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러 과학기술의 날 행사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관심을 끌 만한 러시아 AI와 우주 연구 성과물이 소개됐다. 지난달 29일에는 삼성전자가 러시아에 AI 연구소를 열었다. 김상환 한국기술벤처재단 창업성장센터장은 “수학과 컴퓨터 과학이 발전한 러시아는 최고 수준의 AI 인재를 보유하고 있다”며 “양국 간 협력을 강화하면 AI 주요 인재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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