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2인자로 사는 법

입력 2018-06-25 19:40  

고두현 논설위원


앨 고어는 ‘미국 부통령의 역사를 새로 쓴 인물’로 꼽힌다. 그는 8년간 빌 클린턴 대통령을 보좌하며 미국의 기술·환경·무역 분야를 발전시켰다. 그러면서 대통령보다 카메라에 작게 잡히도록 늘 한걸음 물러서는 방식으로 2인자의 선을 지켰다.

리처드 라일리 당시 교육부 장관은 “고어가 강한 지도자 자질을 다 갖고 있지만,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이 되려 하지 않기에 둘 사이가 좋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야망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과시하지 않는 것이 최대 장점이라는 얘기다.

뉴욕타임스는 “고어는 1인자와 겹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자기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 덕분에 2인자로 장수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미래에 꼭 필요한 ‘IT(정보기술) 고속도로’ 같은 인프라 구축에 힘을 모았다. 또 가시적인 성과에 비해 시간이 많이 드는 환경 문제에 주력했다. 그 덕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보필한 조지 마셜 장군도 특유의 2인자 리더십으로 많은 공을 세우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은퇴 후 거액의 회고록 집필 제의도 “내가 모신 사람들에게 누가 될 수 있다”며 거절했다.

중국의 ‘탁월한 2인자’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마오쩌둥(毛澤東)에게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견하고는 자청해서 그를 지도자로 추대했다. 그는 늘 마오의 반걸음 뒤에서 그림자처럼 따랐다. 그런데도 역사가들은 “실제 중국을 이끈 두뇌는 저우언라이”라고 평했다.

옛적 조조의 천하 패권 구상을 도운 명참모 순욱과 유방을 황제 자리에 올린 장량 역시 그런 인물이다. 하지만 잘못하면 라이벌로 찍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수도 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주인공 한신과 조선왕조 초창기의 정도전이 그런 예다. 참모는 물이 그릇에 맞춰 모양을 바꾸듯 리더의 요구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그게 2인자의 숙명이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영원한 2인자’ JP(김종필)는 “1인자에게 절대로 밉보이지 말 것”을 제1 생존법으로 꼽았다. 1980년 신군부 핵심인 육사 후배 노태우에게 그렇게 충고했다. 또 “1인자가 서운하게 대하더라도 결코 서운한 표현을 하지 말라”고 했다. 서운함을 드러내면 이간질 세력이 틈을 파고든다는 것이다.

기업 경영이라고 다를 게 없다. 빌 게이츠를 ‘컴퓨터 황제’로 등극시킨 스티브 발머는 자신의 제품 개발 공을 게이츠에게 다 돌렸다. 이런 ‘서번트(섬김) 리더십’은 절제·겸손과 함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세상을 움직이는 2인자들의 덕목이다.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연주하기 힘든 악기가 제2바이올린이다. 그만큼 2인자 역할은 어렵다. 어쩌면 ‘고독한 1인자’보다 더 고독한 자리인지도 모른다.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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