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사법연수원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부산에 사는 친구로부터 갓 태어난 강아지 한 마리를 분양받았다. 강아지가 태어난 곳이 부산 남천동이어서 이름을 ‘부남이’로 지었다. 부남이는 집에 온 뒤 계속 설사를 하다가 1주일 만에 죽고 말았다. 초등학생이던 큰 딸아이와 작은 딸아이가 몹시 슬퍼해서 위로하느라 애를 먹었다.
부남이와의 짧은 만남을 글로 써서 사법연수원 회보에 기고했는데, 그 내용이 교수와 연수생들 사이에 잠시 화제가 됐다. 글의 제목이 ‘부남이와의 1주일’이어서 그때부터 한동안 필자의 별명은 ‘부남이 아저씨’가 됐다.
부남이가 죽은 뒤 이번엔 튼튼한 강아지를 키우다가 사정이 생겨 다른 분에게 넘겨줬다. 얼마 있다가 다시 어린 강아지 한 마리를 구입했다. 두 번의 힘든 이별을 겪은 탓에 다시는 강아지를 키우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당시 고교 3학년이던 둘째가 밤늦게 귀가할 때 반겨줄 친구를 필요로 해 마음을 바꾼 것이다. 강아지가 처음 온 날 비가 많이 와 이름을 ‘다비’로 지었다.
어느덧 다비는 열다섯 살이 됐고 다비가 유독 잘 따르던 둘째는 얼마 전 결혼을 했다. 열다섯 살 다비는 특별히 아픈 데는 없으나 잘 가리던 대소변을 자주 실수하고 한밤중에 소리를 지르는 등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다. 둘째가 보이지 않자 전보다 더 기운이 없고 어쩌다 딸아이가 다녀가면 현관문을 향해 이상한 소리를 지르곤 한다. 요즘 다비와 다시 이별할 순간을 떠올리면서 생명이 있는 것과의 인연을 자주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강아지야 키우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사람이 태어나 피할 수 없는 이별이 부모님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홀로 계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가누기 힘들고,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별의 시간이 다가옴을 절감한다.
그러나 모든 만남이 그렇듯 모든 살아있는 것과의 이별 또한 자연의 섭리다. 자연에서 온 생명체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식은 우리에게 죽음에의 순응을 일깨워 준다. 삶은 그래서 더 특별하고 아름다운 것일 게다. 그러니 인연은 소중하지만 결코 집착할 일은 아니다.
작가 황경신의 《그림 같은 신화》 서문 한 구절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혹은 이 지구와 지구가 속해 있는 우주가 하나의 유기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같은 유기체에 속해 있는 일부분이 다른 일부분에게 안부를 전하고 묻는 일, 나에게는 그것이 무척 중요하고 아름다운 일처럼 느껴졌다. 이를테면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 ‘당신의 세계는 나의 세계이니 우리 서로 안녕하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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