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선/김형규 기자 ]
“‘치맥’은 궁합이 잘 맞습니다. 닭은 더운 음식이라 맥주의 찬 성질을 눌러주죠.”
서울 여의도 국회 근처의 남도음식점 남도마루에서 지난 14일 마주 앉은 이재광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사장(57)과의 대화는 장소에 걸맞게 음식 궁합 얘기로 시작됐다.
그는 “한때 건강이 나빠져 허준, 이제마와 더불어 조선의 3대 명의라는 사암도인의 침구요결을 조금 배웠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음식 궁합도 공부했다고 했다.
‘조금’ 공부했다는 겸양치곤 구사하는 용어가 예사롭지 않았다. “등산할 때 무릎이 좋지 않으면 양 손톱으로 바늘땀을 놓는 엄지 혈인 ‘소상’을 누르면 통증이 사라진다”는 식이다. 이쯤 되면 슬슬 마주 앉은 이의 ‘정체성’이 의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이런 궁금증은 인터뷰 말미에 풀렸다.
동석한 박승만 HUG 홍보처장은 “4~5년 전에 한의학 공부를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직원들에게 치료법을 전수하는 특강을 할 정도로 마니아 수준 실력”이라고 거들었다. 이 사장은 “원래 무언가에 한 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끈질긴 성격”
남도마루는 여의도 증권가와 금융권에서 오래 몸담은 이 사장이 고향의 맛이 그리울 때마다 들르는 단골집이다. 중학생 때까지 광주에서 자란 그는 “서울에 여러 남도식당이 있지만 이 집이야말로 어머니의 손맛을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한 상 가득 차려진 보리굴비, 낙지초무침, 병어회, 피문어, 참소라 등은 한눈에도 남다른 싱싱한 빛깔과 감칠맛을 뽐내는 듯했다. 남도 특유의 향이 방안을 맴돌았다.
금융권에서 잔뼈가 굵은 이 사장이 아파트 분양보증이 주 업무인 HUG 사장으로 결정됐을 때는 이례적인 발탁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HUG 사장은 주로 국토교통부 출신 고위직이나 건설업계 출신 인사가 맡는 것이 오랜 관행이었다. HUG 취임 이후 겪은 이 사장의 소회가 그래서 더 궁금했다.
“흔히 투자 대상을 주식, 채권, 부동산, 대체투자 등으로 나누는데 부동산의 사이클이 가장 길죠. 분양보증이라는 건 부동산을 담보로 개런티를 하면서 보증료를 받는 업무인데, 사실은 보험에 가까운 성격이죠. 그리고 HUG는 3년 전부터 160조원 규모의 주택도시기금도 운용하고 있습니다. 대출도 하죠. 와서 보니 HUG는 종합금융회사에 가까워요. ‘이래서 나를 오라고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 어서 들어보세요.”
이 사장은 바다와 가까운 전남 무안이 고향인 어머니가 자주 해줬다는 낙지초무침을 가장 좋아한다며 권했다.
“이게 생낙지가 아니면 제맛이 잘 안 납니다. 삶았다 금방 꺼내야 하는데 그 타이밍이 중요하죠. 낙지볶음보다 요 초무침으로 비벼 먹으면 더 맛있습니다.”
단골의 인터뷰가 진행된다는 말을 듣고 인사차 온 김경일 남도마루 사장이 민어회 몇 점을 서비스로 내왔다. 된장에 찍어야 제맛이라는 민어의 흰 속살에 자꾸 손이 갔다. 이 사장은 “깻잎을 뒤집어 싸 먹으면 향이 더 강하다”고 알려줬다.
다채롭게 펼쳐진 음식처럼 그가 조곤조곤 풀어놓은 이력도 꽤 변화무쌍했다. 그는 “원래부터 금융인을 꿈꾼 건 아니었다”고 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온 그는 노동경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노동조합을 전공했다. 배무기 전(前) 울산대 총장이 은사다.
“선친이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전력 지부장을 했는데, 노조활동을 ‘세게’ 했습니다. 정직이나 감봉도 많이 당했고요. 그런 걸 보고 자라다 보니 노동경제학에 관심을 두게 된 것 같습니다. 노동이라는 입장에서 경제학을 이해하려고 했던 거죠.”
우연처럼 다가와 운명이 된 금융인의 길
대학원을 마친 뒤 그는 투자자문사에 입사했다. 3년 정도 일하고 돈을 모아 유학을 가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외국계 증권회사에서 애널리스트 제의가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금융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국제재무분석사(CFA) 공부를 시작했다. 금융 전반을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고 해외 인맥을 쌓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지인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업무에 쫓겨 공부를 이어나가기 힘들었지만 그는 2002년 자격증을 땄다. 끝장을 보는 집요한 성격이 10년 공부의 밑천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 덕에 2011년 CFA홍콩협회에서 3년간 근무하는 기회도 얻었다. 이런 인생의 여정을 두고 그는 “세상에 우연은 없고, 우연에 가까운 필연이 있는 것 같다”며 “모든 일이 인과(因果)를 따져보면 다 연결고리가 있는 법”이라고 말했다.
2001년 옮긴 국민연금에서는 첫 리서치팀장을 맡아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지금이야 일상적인 업무가 됐지만 당시만 해도 국민연금이 주식, 채권 등에 투자하는 데 익숙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투자 포트폴리오 모델을 개발하고 분석하고 운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제대로 된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수많은 반복과 시행착오를 거쳐 프로세스의 실수와 오차를 줄이는 것이 관건”이라며 “돌이켜보면 끈질긴 성격이 한몫한 것 같다”고 웃었다.
상에 오른 음식을 골고루 맛봤을 때쯤 주방에서 짱뚱어탕을 내왔다. 추어탕과 비슷한데 맛은 훨씬 담백했다.
“이건 벌교에서 주로 나는데 사실 그 지역에선 꼬막보다 짱뚱어탕을 더 쳐줍니다. 고향에 내려가면 죽마고우들이 꼭 사주는 음식이기도 하죠.”
중학생 시절 그는 태권도 유도 검도 등을 즐겼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단신이지만 다부진 체격이었다. 그는 “선친이 건강을 위해 쉰 살이 넘어 합기도를 시작해 내리 4단을 땄는데 그런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이 사장의 집요한 성격도 부친에게 물려받은 내력인 듯했다.
“리스크 관리 중요, 분양가 규제 불가피”
HUG는 요즘 건설업계에서 ‘저승사자’로 통한다. 아파트 분양을 위해선 반드시 HUG의 분양보증을 받아야 하는데, 건설사가 책정하는 분양가를 모조리 깎고 있어서다. 서슬 퍼런 HUG의 위세는 서울 용산에 들어서는 고급 아파트 ‘나인원 한남’이 HUG의 엄격한 기준을 맞추지 못해 임대로 사업을 틀면서 또 한번 화제를 모았다. 분양보증에 대한 이 사장의 원칙은 확고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돈을 줄여야 하는데 한국은 그러질 못하고 오히려 돈을 풀었습니다. (부동산경기 호황으로) 분양보증 잔액이 380조원을 넘어선 상황입니다. HUG가 가보지 않았던 수준까지 온 것이죠. 그만큼 선제 위험 관리가 필요합니다. 업계가 요구하는 수준대로 분양가를 마냥 올리다가는 경기 하강 시기에 큰 어려움에 처할 수 있습니다. HUG는 부동산시장 침체기에 혼란을 막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더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금융권 경력을 살려 HUG가 다양한 기법의 보증 상품을 개발하는 방안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한 임대아파트의 하자보수 보증이 대표적이다. 이 사장은 “도시재생사업과 관련한 다양한 보증상품에 대해서도 여러 아이디어를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법제화가 이뤄지면 공기업 최초로 ‘노동이사제’를 도입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고 강조했다. 노동조합 대표가 이사회에 들어가 발언권과 의결권을 행사하는 제도를 실현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노동이사제는 경영자와 노동자가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HUG는 지배구조가 잘 돼 있고 노조의 역량도 높은 편이어서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 사장에게 임기 중 목표가 무엇인지 물었다.
“저는 3년짜리 임시직일 뿐 궁극적으로 HUG는 직원들의 회사라고 생각합니다. 이 기간에 서민주거 안정에 도움이 되고, 무엇보다 리스크 관리를 잘해 HUG가 지속가능한 공기업이 되도록 기초를 다지는 사장으로 남고 싶습니다. 물론 임기 이후 목표도 있습니다. 뭐냐고요? 제2의 인생으로 한의사를 할 겁니다. 한의학을 더 공부해 봉사하며 남은 생을 보내고 싶은 꿈을 간직하고 있죠. 하하.”
■ 이재광 사장은
△1962년 광주광역시 출생
△1981년 전주고 졸업
△1985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87년 서울대 경제학 석사
△1996~1997년 크레디리요네증권 이사
△1997~1999년 다이와SBCM증권 상무
△2001~2002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본부장대행
△2002~2005년 한일투자신탁운용 전무
△2005~2008년 KDB자산운용 상무
△2008~2010년 한국투자증권 상무
△2011~2013년 CFA홍콩협회 임원
△2013~2018년 이에스지모네타 대표
△2018년 주택도시보증공사 사장
■ 주택도시보증공사는
국토교통부 산하 공기업… 서민기금대출 등 업무 확대
주택도시보증공사는 국민 주거복지 증진과 도시재생 활성화를 위해 각종 보증업무, 정책사업, 주택도시기금 운용관리를 담당하는 국토교통부 산하 공기업이다.
1993년 주택사업공제조합으로 출범해 1999년 대한주택보증으로 전환 설립된 이후 2015년부터 주택도시기금(옛 국민주택기금)을 전담 운용하면서 사명이 주택도시보증공사로 변경됐다. 약칭으로 HUG로 불린다.
대한주택보증 시절까지는 아파트 분양보증 업무를 주로 취급하는 기관으로서 건설회사와 주택사업자 외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이었다. HUG로 전환되고 주택도시기금을 전담하면서 전세금반환보증, 임대리츠, 서민 기금대출, 도시재생 등 업무영역이 대폭 확대돼 지금은 국토부의 주택·도시 정책을 지원하는 핵심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이재광 사장의 단골집 남도마루
짱뚱어탕·낙지초무침… 남도의 맛 그대로
서울 여의도동에 있는 남도마루는 여의도 금융권 관계자, 국회의원, 국회 직원들이 많이 찾는 장소다. 칸막이 방이 많아 식사를 곁들이면서 중요한 얘기를 나눌 때 주로 찾는다. 호남 출신인 김경일 남도마루 사장은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 맛을 그대로 식탁에 담아내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동향 출신 단골들이 “어머니의 손맛과 똑같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홍어삼합, 낙지초무침, 보리굴비, 해물 숙회, 짱뚱어탕, 계절별 제철 생선회 등 7가지 메뉴로 구성돼 있다. 산낙지, 참소라, 갑오징어 숙회 등 반찬 구성도 푸짐하다. 저녁에 막걸리 한 잔 하기 위해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도 많다. 남도마루는 당일 들여온 신선한 재료로 음식을 조리한다. 김 사장은 “음식을 조리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신선한 재료”라며 “매일 새벽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 가서 재료를 엄선해 가져온다”고 말했다.
이정선/김형규 기자 leewa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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