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실존이 뭐길래… 미술인생 40년 매달렸나

입력 2018-07-04 18:05  

극사실주의 화풍 이끈 이석주 화백의 실험과 도전

천안아라리오서 내달 12일까지
회고전 형식의 대규모 개인전
'실존과 시간의 공존' 화두로
몸부림치며 작업한 미학 조명

책·시계·말·명화 이미지를
사진처럼 정교하게 그린
100~500호 대작 45점 걸어



[ 김경갑 기자 ]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책이나 오래된 시계, 들판을 달리는 기차, 거침없이 뛰고픈 욕망을 간직한 말(馬)…. 고전 명화를 보는 순간 허공엔 스르르 ‘환영(illusion)’이 감지되고 시간의 흐름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내달리며 ‘시간의 나이테’를 축성하는 이들 이미지는 언젠가는 꽃잎처럼 사라지고 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한국 극사실주의(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화풍의 대표 작가 이석주 화백(66·숙명여대 명예교수)의 그림 앞에선 그저 망연해진다. 화면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 책과 시계, 말, 명화 이미지일 뿐인데 알 수 없는 적막감과 실존적인 신비감이 우수수 따라온다.

다음달 12일까지 충남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리는 이씨의 개인전은 이런 ‘실존과 시간의 공존’이란 무거운 주제를 화두로 삼고 평생 몸부림치며 작업한 미학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3년 만에 연 이번 전시에는 100호에서 500호에 달하는 ‘사유적 공간’ 대형 신작을 중심으로 1970~1980년대 초기작 ‘벽’, ‘일상’ 시리즈 등 45점을 걸었다. 1970년대 말부터 현재에 이르는 40년간의 작업 궤적을 회고전 형식으로 꾸몄다.

4일 전시장에서 만난 이 화백은 “말과 시계, 책 같은 평범한 소재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름다운 세계에 도달하고픈 열망을 많은 사람과 음식을 나눠 먹듯 맛있게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홍익대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숙명여대에서 줄곧 교편을 잡아온 이 화백은 고영훈, 지석철, 주태석 씨와 함께 ‘하이퍼리얼리즘 사총사’로 꼽힌다. 1970년대 말 소비사회의 풍요를 냉소적으로 관조하는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을 흡수해 시각과 촉각성을 동시에 아우른 극사실 형상의 경지를 이뤄냈다. 1983년에는 아시아미술비엔날레에서 금상을 받아 한국적 극사실주의 화풍의 우수성을 알렸다.

최근 작업실을 경기 가평 대성리에서 양평 서종면으로 옮긴 그는 “작품 내용에 집중하기보다는 에너지가 넘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100호가 넘는 대작을 통해 낯선 실존 세계를 탐험하겠다는 얘기다. 크게 확대된 낡은 책이나 떨어져나온 책 페이지들도 명화나 말 이미지를 연결하면서 마치 새로운 시공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이미지를 최대로 확대해 현대인의 존재감을 사유해보려 한 시도”라고 설명했다. 작품은 커졌지만 일관된 주제는 ‘흐르는 시간’ 그대로다.

그는 왜 화업 내내 시간과 실존의 실체를 잡아내는 데 집착하고 있을까. “보는 것과 아는 것이 한데 결합돼 나타난 게 시간입니다. 기억의 앙금들을 건져올려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교차시켜주는 게 핵심이죠. 시간의 축적을 관찰해 그림에 차곡차곡 담아내고 흡수시키는 일이 흥미로워요.”

이 화백은 극사실주의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 부친의 삶과 연결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부친은 한국 현대연극의 선구자였던 이해랑 선생(1916~1989)이다. “아버님은 연극을 하면서 평생 ‘리얼리즘’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셨어요. 흘러간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려내야 한다는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맴돕니다. 현대미술은 개념적 경향이 강해 제게는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 화백의 화면에서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질적인 대상의 결합) 기법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그의 작품에선 구겨지고 낡은 책 옆에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나 프랑스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오달리스크’, 이탈리아 바로크미술의 거장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처럼 익숙한 명화의 부분 이미지들을 놓음으로써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자아낸다.

작품의 변화는 재료의 변화를 동반하고 있다. 유화 물감을 바른 뒤 매끈하게 처리한 바탕색의 표면이 한층 포근해졌다. 이전의 작가가 고뇌하는 사색가였다면 이제는 자연과 인생을 노래하는 시인의 모습이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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