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수필 속 수첩을 만들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 의미에서
문구점 아닌 서점에서 판매 나서
'유명인이 썼다' 스토리 입혀 차별화
"쓰고 그리는 게 창의성 키워"
사무실 곳곳에 메모지·필기 가득
수첩 속 그림, 스마트폰 앱 연동
디지털과 결합…기술변화에 대응
재단 세워 개도국 어린이 지원
"수첩이 사람들에게 영감 주듯이
미래세대 잠재력 깨우는 게 목표"
전세계 80개 매장…2000억 매출
필기구·가방 등 500여 제품 판매
[ 유승호 기자 ]
사소한 메모와 일정까지 컴퓨터나 휴대폰에 저장하는 시대다. 종이와 펜을 꺼내 무언가를 적는 것은 불편하고 불필요한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가끔은 종이에 펜으로 글씨를 써 내려갈 때 느껴지는 감촉이 그리워질 때도 있다. 이탈리아의 고급 수첩 몰스킨을 보면 더 그렇다. 별다른 장식도 없는 검은 표지, 특별할 것 없는 하얀 종이, 한 권에 2만원이 넘는 다소 비싼 가격이지만 세계적으로 한 해 1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노트북과 휴대폰을 제쳐두고 몰스킨에 자신만의 얘기를 적어 나간다. 누군가에게는 여행일지, 누군가에게는 사업계획서, 또 누군가에게는 스케치북인 이 수첩의 역사는 아주 우연한 계기에 시작됐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
이탈리아 로마 출신 작가이자 디자인 컨설턴트인 마리아 세브레곤디는 1995년 튀니지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여행지에서 영국 작가 브루스 채트윈의 수필 ‘송 라인(The Songlines)’을 읽었다. 세브레곤디는 수필의 한 대목에서 오래 전 기억을 되살렸다.
프랑스어로 ‘카르네 몰스킨(인조가죽 수첩)’으로 불리던 작은 수첩에 관한 내용이었다. 수필에 묘사된 수첩은 세브레곤디가 1980년대 초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할 때 쓰던 수첩과 비슷했다. 그는 채트윈뿐만 아니라 파블로 피카소, 빈센트 반 고흐,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유명 예술가와 작가들도 그것과 비슷한 수첩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수첩을 만들던 회사가 문을 닫아 더 이상 수첩을 살 순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세브레곤디는 밀라노에서 ‘몰스킨’이라는 이름으로 상표권을 등록하고 수첩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아름답게 되살려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2년 뒤인 1997년 몰스킨 수첩이 시장에 첫선을 보였다.
마케팅을 어떻게 할지가 과제였다. 세상엔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수첩이 있었다. 몰스킨과 비슷하게 단순한 디자인을 특징으로 한 제품도 많았다. 그러나 틈새도 보였다. 여러 종류의 수첩이 있었지만 시장을 대표하는 유명 브랜드는 없었다. 다른 제품과 차별화된 마케팅을 전개하면 고급 브랜드로 자리잡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세브레곤디는 몰스킨을 문구점이 아니라 서점에서 팔기로 했다. 단순한 수첩이 아니라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이라는 의미에서였다. 세브레곤디는 “몰스킨은 피카소와 헤밍웨이가 쓰던 수첩이라고 소비자에게 알렸다”며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스토리를 통해 차별화를 시도했다”고 말했다. 처음 내놓은 제품이 며칠 만에 모두 판매되는 등 몰스킨은 시장에 나오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다.
◆손으로 적으면 현실이 된다
몰스킨은 과거 유명 예술가와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건축가와 벤처 기업인 등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몰스킨을 즐겨 쓴다는 점을 내세운다. 하지만 이런 사실만으로는 몰스킨의 인기를 설명하기에 부족해 보인다.
세브레곤디는 수첩에 뭔가를 적고 그리는 일이 실질적인 효용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우리의 아이디어는 물리적인 형태로 볼 수 있을 때 더 현실적이 된다”며 “수첩 더미는 어떤 일에 대한 생각과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스스로를 창의성과 지식의 조력자라고 생각한다”며 “세상은 더욱 더 손에 잡히는 것, 인간적인 것을 갈망하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세브레곤디의 일상생활도 수첩과 필기로 가득차 있다. 그의 사무실은 항상 종이 더미와 고무줄 뭉치, 각종 메모지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 하루 일정과 그날그날 해야 할 일 목록도 종이에 펜으로 적어 관리한다. 그는 “검은색 하드커버 몰스킨 없이는 살 수 없다”며 “아이디어와 미래 프로젝트에 대한 구상이 담겨 있는 이 수첩은 내 필수품”이라고 말했다.
몰스킨의 소비자는 아날로그의 향수에 젖은 중장년층만이 아니다. 젊은 소비자도 몰스킨에 열광한다. 세브레곤디는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세대)가 디지털 시대에 성장했지만 그들이 가상 세계만을 원하지는 않는다”며 “밀레니얼 세대는 손으로 쓰는 물건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종이와 필기구에 집중한다고 해서 기술 변화를 아예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몰스킨은 아날로그 제품과 디지털 기술을 결합한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에버노트와 제휴해 수첩에 적은 내용을 스마트폰 또는 태블릿PC와 동기화할 수 있는 제품을 내놨다. 수첩에 그린 그림을 스마트폰 앱에 옮긴 뒤 디지털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서 할 수 있는 서비스도 어도비와 함께 개발했다.
◆2000억원대 매출 글로벌 기업
시장에 첫선을 보인 지 20여 년이 지나면서 몰스킨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밀라노의 작은 회사로 출발한 몰스킨은 지난해 1억5540만유로(약 2019억원)의 매출을 올린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몰스킨 수첩의 크기와 색상, 디자인은 훨씬 다양해졌다. 필기구, 가방 등 몰스킨이 판매하는 제품 종류는 500여 가지로 늘었다.
세계에 80개가 넘는 매장을 두고 있고 밀라노 등에는 몰스킨의 브랜드 이미지를 살린 카페도 열었다. 2016년 말엔 벨기에의 자동차 수입업체 디테른이 지분을 인수하는 등 회사 지배구조도 달라졌다.
창업자이자 브랜드·커뮤니케이션 담당 부사장으로서 경영을 이끌던 세브레곤디는 일선에서 물러나 몰스킨재단 운영에 주력하고 있다.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몰스킨재단의 주요 사업이다. 몰스킨 수첩이 그것을 쓰는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개발도상국 미래 세대에게 창조적인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잠재력을 일깨우는 것이 세브레곤디가 하려고 하는 일이다.
몰스킨 수첩의 표지를 넘기면 분실했을 때 돌려받기 위한 연락처와 사례금을 적는 칸이 있다. 한 장을 더 넘기면 아무것도 없는 백지다. 세브레곤디는 종이에 펜으로 적듯 자신의 인생을 새로운 일로 채워나갈 것이다. 인생은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인지도 모른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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