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토론토 기차여행
기차는 절경을 따라…
전기·車·전화 없이 살아가는 마을 세인트 제이콥스
안타까운 사랑의 전설이 있는 사우전드 아일랜드
[ 최병일 기자 ]
세상에서 하지 말아야 할 여행이 있다면 크루즈 여행과 장거리 기차여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크루즈 여행이나 기차여행이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취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육체적 부담이 덜한 대신 볼거리나 활동량이 적은 여행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캐나다 여행이 나흘이나 기차여행이 이어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토론토에서 밴쿠버로 이어지는 4500㎞ 거리를 달리는 동안 캐나다의 비경을 보며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기차여행은 내면을 찾아가는 여행이었습니다. 기차가 멈추면 재스퍼, 앨버타 주의 주도인 에드먼턴, 평원 지대의 사스카툰과 위니펙 등 매력적인 도시가 나타납니다. 기차여행이 끝나고 만난 자연주의 캐나디안이 살고 있는 세인트 제이콥스, 1000개의 섬이 끝없이 펼쳐진 사우전드 아일랜드, 나이아가라까지 황홀하게 이어졌습니다. 이 매력적인 나라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밴쿠버=글·사진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
최적의 열차 공간… 맛있는 음식은 덤
“캐나다의 동과 서를 연결하는 국영철도 비아레일(VIA Rail)은 총 운행거리 1만2500㎞를 19개 노선으로 나눠 운행하며 캐나다 전역 450개 역에 정차합니다. 캐나다를 여행하는 낭만적인 방법 중 하나로 세계 철도여행 팬들이 좋아하는 관광열차이기도 합니다. 가장 인기있는 노선은 이번에 손님이 경험하실 밴쿠버~토론토를 운행하는 ‘캐나디안’호입니다. 약 4500㎞ 거리를 87시간에 걸쳐 달리는데 3박4일 동안 로키산맥의 관광 거점인 재스퍼, 앨버타 주의 주도인 에드먼턴, 평원 지대의 사스카툰과 위니펙 등 매력적인 도시를 거치며 대평원, 로키산맥, 호수 등 캐나다의 비경을 만나게 됩니다.”
비아레일 승무원인 제스퍼는 활기찬 목소리로 기차를 소개했다.
밴쿠버 퍼시픽센트럴 역에서 노란색 기차표를 손에 쥐고 기차 허리쯤에 있는 217호실 F방으로 들어섰다. 인도의 대열반 열차를 타고 10박이 넘는 여행을 하고 난 뒤 10년 만에 떠나는 장거리 기차여행이다. 기차여행은 사실 쉽지 않다. 종일 이어지는 기차의 진동을 몸으로 받고 있으면 생활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도 불편하다. 그럼에도 기차여행이 좋은 것은 온전하게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가 침대에 앉으니 마치 사색의 감옥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방은 아담했다. 편안한 의자 두 개가 놓여 있고 의자를 젖히면 편안한 침대가 내려오는 구조다. 벽에는 옷이나 가방을 걸 수 있는 고리 몇 개와 거울, 온도조절장치(에어컨디셔너), 작은 선풍기가 달려 있다. 시선이 놓이는 쪽으로 세면대와 작은 문을 열면 화장실이 있다. 머리 위에는 2단계 밝기 조절이 가능한 독서용 조명이 붙어 있다. 벽장처럼 생긴 선반에 수건과 샴푸 비누 등을 넣어둔 노란색 세면도구가 여러 개 놓여 있다.
특급호텔을 생각한다면 여러모로 아쉽겠지만 이만하면 부족한 것이 없다. 열차 한 칸에 1인용 샤워실도 있다. 다만 열차 한 칸에 샤워실도 하나여서 다소 불편할 수는 있다.
아침식사는 정통 아메리칸 스타일이다. 스페셜 오믈렛과 메이플 시럽을 뿌려서 먹는 팬케이크는 물론 베이컨 달걀프라이 등 네 가지 음식 중에서 기호에 맞는 음식을 즐기면 된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어떻게 이런 음식들을 준비했나 싶을 정도로 맛이 빼어났다. 점심은 대개 치킨이나 파스타 같은 음식이 나오고 저녁은 그럴듯한 정찬이 차려진다. 잘 구운 스테이크에 해산물 요리까지 매일매일 신선한 음식이 준비된다. 침대석은 모든 식사가 기차요금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가격을 신경쓰지 않고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를 수 있다. 게다가 디저트나 음료 등은 몇 개를 시켜도 웃으면서 더 가져다준다. 맛있는 음식이 여행의 절반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꼭 권하고 싶을 정도다.
전파도 잡히지 않는 광활한 대륙
기차는 어느새 로키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로키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롭슨산의 만년설이 눈부시게 다가온다. 높이만 3945m에 달하는 롭슨산은 54만 년 전에 시작됐다고 한다. 자작나무 사이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롭슨산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다.
롭슨산을 넘으니 테리 폭스(Terrance Stanley Fox) 산이 나타났다. 테리 폭스는 한국인에게는 낯설지만 캐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국민 영웅이다. 테리 폭스는 캐나다의 운동선수이자 암 연구 활동가였다. 폭스는 포트코퀴틀럼의 고등학교와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교를 다닐 때 육상과 농구 선수로 활약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어느날 무릎에 격렬한 통증이 느껴져 병원에 갔더니 골육종이라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았다. 1977년 수술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인공 다리를 달고 밴쿠버에서 휠체어 농구 선수와 육상 선수로 맹활약했다. 1980년에는 암 연구를 위한 자선 마라톤을 시작했다. 폭스는 143일 동안 무려 5373㎞를 달리며 암 연구의 중요성을 세상에 알렸다. 그가 달리는 동안 수많은 캐나다 사람이 감동받아 같이 달리거나 기부금을 냈다. 하지만 마라톤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암이 폐까지 전이돼 9개월 뒤 폭스는 세상을 떠났다. 질병을 극복하려는 그의 강인한 의지는 꺾였지만 숭고한 정신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1981년부터 매년 60개국 이상이 테리 폭스 달리기(Terry Fox Run)를 개최하며, 수만 명이 참가한다. 테리 폭스 달리기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암 연구를 위한 1일 자선 운동이며, 그의 이름으로 5억 캐나다달러 이상을 모금했다고 한다.
기차 밖으로 풍경들이 무심하게 흘러갔다. 파노라마 전망대에 앉아서 창밖을 보니 잣나무가 끊임없이 스쳐 지나간다. 행여 인터넷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비아레일에서는 포기하는 것이 좋다. 전파도 잡히지 않는 광활한 대륙을 횡단하기 때문에 인터넷은 물론 전화 통화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
파크카에서 바라보는 캐나다 풍경
트렁크가 무거워질까봐 책을 충분히 챙겨오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먼데 벌써 책을 세 권이나 읽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잠이 몰려와서 낮에 잠을 충분히 자다 보니 정작 자야 할 시간에는 잠이 오지 않아서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 책을 읽지 않을 때는 열차의 중간마다 있는 파크카에 우두커니 앉아 마치 영화처럼 흘러가는 풍경과 하나가 됐다. 180도로 둥그렇게 난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파크카는 비아레일의 전망대 역할을 톡톡히 한다. 열차의 천장, 양옆, 앞뒤가 모두 창문으로 돼 있어 캐나다의 아름다운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캐나디안호는 대략 8번 정도 정차하는데 몇 번은 잠을 자느라 미처 하차하지 못했고 그중 가장 인상적인 곳이 재스퍼다. 고층건물도 없고 단층집에 산이 보이는 작은 마을이 재스퍼의 전체적인 인상이었다. 캐나디안 로키를 관광하는 관문인 재스퍼는 만년설이 내려앉은 롭슨산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기차는 친구를 사귀기 가장 좋은 공간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이 잠자고 식사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마음이 열리는 마법 같은 공간이 바로 기차 안이다. 쉽게 사람과 친해지지 못하는 기자조차 중국 철도청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직한 뒤 세계 대학교를 찾아 여행을 한다는 별난 중국 노인을 비롯해 스타를 꿈꾸며 기차에서 노래하는 연상연하 부부 가수까지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신기한 것은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시간 변경선을 넘는 것이다. 나라 안에 4~5시간의 시차가 있는 나라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나라다 보니 당연한 일인데도 왠지 마법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차가 대륙을 횡단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횡단하는 것이다. 캐나디안호를 탑승하면 밴쿠버에서 토론토까지 가는 동안 총 세 번의 시간 변경선을 넘는다. 예를 들어 밴쿠버가 오전 8시일 때 에드먼턴은 9시, 사스카툰과 위니펙은 10시, 토론토는 11시다. 각각의 시간대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3시간의 시간 변경선을 넘어 드디어 토론토에 도착했다. 4일 만이다.
세인트 제이콥스와 사우전드 아일랜드의 절경
온타리오주 남단에 있는 작은 마을인 세인트 제이콥스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개신교의 한 분파인 재침례교파로 알려진 메노나이트 교파 사람들이 군락을 이루고 사는 이곳은 고적하고 차분하다. 1786년 캐나다로 이주해 살고 있는 메노나이트 사람들은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기독교적인 질서 속에서 살고 있는 이색적인 사람들이다. 전기와 자동차와 전화 없이 살아가지만 자연속에서 살아가며 기쁨을 느끼는 자연주의자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주로 농업과 축산으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사과 농사를 짓거나 단풍나무에서 시럽을 채취해 판매하고 있다. 캐나다의 메이플 시럽 중에서 품질이 좋기로 유명한 제품은 대개 메노나이트 사람들이 생산한 것이라고 한다.
세인트 제이콥스를 뒤로하고 온타리오에서 2시간30분 거리에 있는 킹스턴으로 향했다.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세인트 로렌스 강 위에 펼쳐진 사우전드 아일랜드를 보기 위해서다. 사우전드 아일랜드는 이름처럼 딱 1000개가 아니라 1150개의 섬으로 돼 있으며 그중 캐나다령에 속한 것은 660개라고 한다.
사우전드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볼트 성(Boldt Castle)이 있는 하트 섬(Heart Island)이다. 미국 뉴욕의 유명 호텔인 월도프 애스토리아호텔(현재 힐튼호텔) 소유주인 볼트가 자신의 아내 생일인 밸런타인 데이에 성을 선물했다고 한다. 사우전드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요리사가 볼트의 병든 아내를 위해 개발한 소스가 바로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이다. 안타깝게도 볼트의 아내는 성의 내부 공사가 한창일 때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볼트는 이 섬을 다시는 찾지 않았다고 한다. 안타까운 사랑의 전설이 남아있어서인지 현재는 결혼식장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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