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내 첫 거품 극약처방이었던 1958년'국채 파동'
유일한 채권이었던 건국국채
국회서 추가발행 반대 했다가
기존 결정 뒤집고 통과시켜
시장은 거짓 정보·작전 난무
국채가격 롤러코스터 이어져
참다 못한 이승만 정부
결제불이행 사태 막으려
'거래 취소' 초유의 조치
국채 거래 공신력 추락에
민간자금 주식으로 대거 이동
채권시장 40년 암흑기 거쳐
1990년대 말부터 도약 시작
[ 이태호 기자 ]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 개설로 태동한 한국 자본시장이 60돌을 넘겼다. 전쟁의 상흔을 딛고 어느덧 세계 10위권 시장으로 발돋움했다. 2009년 자본시장법 시행 이후로는 초대형 투자은행(IB)이 등장하고 사모펀드(PEF)와 대체투자 시장이 성장하면서 기업금융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비약적인 성장 이면에는 수많은 고난도 뒤따랐다. 누군가에게는 꿈이고 누군가에겐 눈물이었던 한국 자본시장의 주요 사건을 돌아본다.
“전날 국채 거래를 모두 무효로 한다.”
1958년 1월17일. 이승만 대통령 집권 3기 재무부 수장이던 김현철 장관은 긴급명령을 공포한다. 16일 이뤄진 ‘제10회 건국국채’ 거래를 전면 취소한다는 내용이었다.
채권시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하루 거래대금 42억환, 현재 가치로 400억원에 달하는 지표물(가장 최근 발행한 채권) 거래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훗날 ‘1·16 국채 파동’으로 불린 이 조치는 정부가 국채가격 폭등에 따른 결제 불이행 사태를 막기 위해 내린 극약처방이었다.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가 개설한 뒤 3년차로 걸음마 단계였던 한국 자본시장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다.
국채시장의 공신력이 추락한 데 따른 후폭풍은 컸다. 유찬 초대 이사장을 비롯해 증권거래소 임원이 전원 물러났고, 투기적 거래를 주도한 증권사 네 곳은 면허를 빼앗겼다. 이어진 정부의 증권업 건전성 강화 규제는 6년간 전체의 절반인 24개사의 폐업을 야기했다.
민간자금은 채권시장을 떠나 주식시장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까지 약 40년간 이어진 한국 채권시장 암흑기의 서막이었다.
◆한국 자본시장 첫 ‘거품’
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첫 투기적 거래가 채권시장에서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56년 거래소 개장 당시 상장 주식은 10여 개에 불과했고, 대부분 정부 또는 소수의 큰손들이 90% 이상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조흥은행(현 신한은행), 저축은행(현 SC제일은행),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등 은행주와 경성방직, 경성전기, 남선전기, 조선운수, 해운공사, 조선공사 등의 주식이 거래됐지만 이자도 안 나오는 종잇조각을 사겠다는 수요는 많지 않았다.
채권시장에선 건국국채가 유일한 상장 종목이었고 거래가 활발했다. 적자 재정에 시달리던 정부가 1950년 처음 발행을 시작한 이 증권을 금융회사에 할당하거나 소액으로 쪼개 파는 등 시장 소화에 힘쓴 결과였다. 자산 증식 수단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오분리(五分利) 건국국채’로 불리던 이 증권의 표면금리는 연 5%였지만 발행 첫해 액면금액의 20% 안팎에서 매수할 수 있었다. 2~3년의 거치기간과 2~5년의 분할상환을 거치면 원금의 다섯 배를 돌려받을 수 있어 1961년까지 6년 동안 거래소 유통증권의 약 80%를 차지하는 인기를 누렸다.
거품 발생의 단초는 1957년 증권사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한 한 소문이었다. 정부가 ‘국채발행계획안(11회 180억환)’과 ‘외환특별세법안’을 동시에 상정했는데 둘 중 하나만 국회를 통과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세입(재정)을 늘리는 두 법안이 상충해 양립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름 설득력을 얻은 이 소문은 수년간의 매매 경험을 바탕으로 투기심리가 싹트기 시작한 증권사 사이에서 ‘일확천금’의 투기 재료로 돌변했다. 국채발행계획안 무산으로 기존 국채가 품귀 현상을 빚을 것이라고 예상한 ‘매수파’가 먼저 움직였다. 미화, 제일, 내외, 대창증권 등이 선봉에 서서 그해 발행한 제10회 건국국채를 공격적으로 사들였다. 반대로 제11회 국채를 결국 찍을 것으로 내다본 천일, 태평, 상호증권 등 ‘매도파’는 채권을 내던지며 응수했다.
치열한 공방은 그해 12월 ‘매수파’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국회 재정위원회가 제11회 국채발행계획 180억환 전액을 삭감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16~17환 정도에 안정적으로 거래되던 액면 100환짜리 제10회 건국국채(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방식) 가격은 그해 12월 세 배인 40환대로 폭등했다. 매수파는 수도결제(증권과 현금의 교환)로 막대한 수익을 정산할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레버리지 거래로 가격 ‘널뛰기’
승리에 도취해 있던 매수파를 아연실색하게 한 소식이 불과 며칠 뒤 튀어나왔다. 1957년 12월31일 국회가 기존 결정을 뒤집고 역대 최대 규모인 180억환의 국채발행계획안을 수정 없이 통과시킨 것이다. 궁지에 몰린 매도파의 강력한 요청을 못 이긴 재무부가 국회를 설득했다는 후문이 뒤따랐다.
자본시장을 뒤흔들 수 있는 법안이 손바닥처럼 뒤집히는 것을 지켜본 채권시장은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거짓 정보와 작전이 난무하고 시장은 요동쳤다. 1958년 1월9일 건국국채는 24환까지 폭락했다. 같은 달 15일엔 38환까지 반등했다가 16일 오전엔 다시 28환으로, 장 마감 땐 45환으로 ‘롤러코스터’를 탔다.
선물처럼 증거금만으로 매매하고 최장 1개월 뒤 차액만 정산하는 당시의 청산거래제도가 진폭을 키웠다. 증권 현물과 대금을 맞바꾸는 실물거래와 달리 적은 현금으로 큰 규모의 거래를 체결하는 ‘레버리지(지렛대)’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물량이 충분하지 않은 증권으로 유통시장 활성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일제강점기부터 존재하던 청산거래제도를 수용했다. 현재의 파생상품 거래제도와 비슷하다. 현재 거래소 현물채권시장은 매매거래일 익일(T+1) 결제가 원칙이다.
실질적인 공매수·공매도가 가능한 청산거래제도를 활용해 증권사들은 사운을 건 도박판에 뛰어들었다. 계약 이행을 위해 실물(제10회 건국국채) 확보 경쟁이 벌어질 때 품귀 현상이 극심해지는 이른바 ‘스퀴즈(squeeze)’ 현상도 변동성에 기름을 부었다는 평가다.
◆채권 암흑기의 시작
보다 못한 증권거래소는 1958년 1월17일 청산거래를 일시 중단하고 긴급이사회를 열었다. 이후 증권사들에 당시 ‘건옥(建玉)’으로 불리던 미결제약정의 매매증거금을 납입하라고 지시했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40여 개 증권사 중 증거금을 구해온 ‘건전한’ 회사는 6곳뿐이었다.
같은 달 28일 정부는 제10회 국채 수도결제를 일괄 실시하며 수습에 나섰다. 결제 불이행분은 한국은행으로부터 약 4억환의 단기 구제자금을 융자받아 처리했다. 당시 증권사 자본금이 2000만~5000만환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막대한 돈이었다. 위약처리 국채는 일반에 공매 처분했다.
도박판을 벌인 증권사들을 향한 정부의 분노는 1공화국 국무회의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김현철 재무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채가격을 부당히 앙등하게 해 이익을 취한 사건이 있어서 그 매매를 취소했다”며 “영업정지 처분에 항의하는 곳이 있어 형사 사건으로 다스리는 절차도 불사할 심산”이라고 보고했다.
시장 참여자 모두에게 상처만 남긴 국채 파동은 이후 한국 국채시장의 침체를 야기했다. 민간 자금은 주식시장으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1961년 5·16 군사정변을 분기점으로 이동 속도는 더 빨라졌다. 채권시장은 이후 1980년대 초까지 발행 잔액 10조원을 밑돌며 경제 규모 대비 지극히 왜소한 외형을 극복하지 못했다. 재정적자 보전 재원은 대부분 한국은행 또는 해외 차입에 의존해야 했다. 기업의 직접금융 창구로서의 역할은 물론 금융시장 ‘신호등’으로서 국채 금리의 작동도 기대할 수 없는 암흑기였다.
한국 채권시장의 본격적인 성장은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대대적인 현대화 개혁을 거친 뒤에야 가능했다. 2018년 7월 기준 국내 채권 발행 잔액은 약 1900조원, 한 달 거래대금은 400조원에 달한다. 한국 정부(국채)의 글로벌 신용등급은 상위 세 번째인 ‘AA’(무디스, S&P 기준)로 중국과 일본을 뛰어넘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채권시장으로서 위상과 규모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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