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헉~” 거대한 몸집의 짐승 울음소리 같은, 공포에 질린 낮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주변은 팽팽한 긴장에 휩싸였다. 한 산악인이 젖은 암벽 경사 길을 오르다가 이끼 낀 바위에서 미끄러지며 내는 소리였다. 그 지점에서 불과 3~4m 아래부터 경사가 더 급해지고 10여m의 수직 절벽이 이어졌다. 그 밑에는 커다란 바위가 제멋대로 깔려 있어 추락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바로 그 장소에서 몇몇 산악인이 안전장치 없이 바위를 오르고 있었다.
늦여름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몇 년 전 일이었다. 산악부 후배들과 차가운 바위의 감촉을 느껴보고 싶어 오른 암벽은 며칠 동안 줄곧 내린 비로 많이 젖어 있었다. 중간 급경사의 넓은 바위는 평소와 달리 물이 조금씩 흘러내리면서 물이끼도 살짝 껴 있었다.
등반대장이 서너 걸음 옮겨보더니 보호 장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 무리의 산악인들이 우리를 힐끔 쳐다보곤 ‘이런 쉬운 데서도 로프를 사용하느냐’는 표정을 짓곤 그대로 올라갔다. 물이끼가 그들이라고 봐주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한두 번씩 가볍게 미끄러지면서 그 지점을 차례로 통과했다.
그 모습이 위험해 보여 잠시 장비를 꺼내던 손을 멈추고 그들이 하는 행동을 쳐다봤다. 그러던 중 한 명이 중간쯤에서 두세 번 미끄러지더니 다리를 벌벌 떨면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그는 다리를 후들거리다 “어~헉~” 소리를 내며 수직 절벽 쪽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동료들도 어쩔 줄 몰라 했고, 근처의 우리 팀도 미끄러져 가는 산악인의 손을 잡아주다가는 절벽으로 같이 휩쓸려갈까 봐 도움의 손길을 주지 못했다. 그 순간 그는 내가 서 있는 바로 옆을 지났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의 왼팔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지옥에서 탈출한 그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동료가 내려준 로프에 몸을 묶고는 그냥 올라가 버렸다. 그 지점에서 30여 분 올라가다 보니 그들이 평평한 바위에 앉아 간식을 먹고 있었다. 도움을 줘 고마웠다고 말하거나 과일 한쪽 먹어보라고 권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그들의 곁을 지나간 후 흥분해서 화를 내는 등반대장에게 말했다. “이 친구야! 화내지 마! 우리 눈앞에서 사고로 죽었다면 오히려 죄책감을 느꼈을 거야. 한 생명을 살려낸 것으로 감사하고 행복해하자.”
올해로 내가 위암 수술을 받은 지 32년이 지났다. 그때 죽지 않고 살아서 그동안 생사의 기로에 선 여러 생명에게 도움의 손길을 줄 수 있었던 것만도 나에겐 큰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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