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 前 영국주재 북한 공사
북한은 '정보접근·이동·脫정치 자유' 없어 불가능
관광에 주력한 뒤 폐쇄적 경제특구 10곳 세울 듯
겉만 바뀐 것일 뿐…북한이 변했다는 착각 버려야
김정은, 핵 없으면 다 잃게 돼…절대 포기 안할 것
美 트럼프가 북한 특유의 '저팔계 외교'에 휘말려
[ 이미아 기자 ]
“김정은이 중국, 베트남처럼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발전에 나선다고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못합니다.”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55)는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와 함께 경제성장을 이룬 ‘베트남의 길’을 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말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에 ‘베트남의 길’을 걸으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에 대해서도 “어이가 없는 제안”이라며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는 “아내 말이 ‘한국에 와서 제일 좋은 게 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물이 나오고 스위치 켤 때마다 전깃불이 켜진다는 것’”이라며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게 북한 체제의 민낯”이라고 강조했다. 18일 한국경제신문 본사에서 만난 태 전 공사가 인터뷰하면서 가장 자주 한 말은 “북한이 변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였다.
▶‘김정은의 북한은 과거와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입니다.
“착각입니다.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이 권좌에서 물러났나요? 아니면 민주주의적으로 통일이라도 됐나요? 북한이 주민들에게 바깥세상과 소통하도록 했나요? 겉으로 나타난 표면적 정세만 변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인가요.
“북한의 모든 정책은 김정은 체제 존속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건 북한에서 헌법보다 더 높이 치는 노동당 규약에도 명시돼 있습니다. 김씨 왕조는 신적인 존재죠.”
▶왜 북한이 개혁·개방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봅니까.
“중국과 베트남엔 있지만 북한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세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정보 접근의 자유입니다. 중국과 베트남에선 어느 정도의 검열은 있지만 인터넷 자체를 막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는 이동의 자유입니다. 북한에선 거주지를 함부로 옮길 수 없고, 여행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중국과 베트남에선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아도 출세할 수 있지만 북한은 다릅니다. 무조건 당원이 돼야만 합니다. 이런 통제사회에서 개혁·개방은 불가능합니다.”
▶북한이 원하는 경제개발 방식은 어떤 것입니까.
“관광특구를 먼저 개발하고 나중에 개성공단과 비슷한 단절적이고도 폐쇄적 형태의 공단을 10여 개 세우는 형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제조업보다 관광이 우선인가요.
“관광을 중시하는 이유는 국제 사회의 제재 없이 개인이 자유롭게 돈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광객이 돈 쓰고 가는 걸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그러니 관광업을 활성화해서 외화벌이에 나서려 합니다. 원산, 백두산 같은 곳을 관광지로 적극 개발하려는 게 그런 이유입니다. 아직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방 국가에서 투자를 받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국 기업들도 개성공단이 폐쇄된 뒤 큰 피해를 입었잖아요. 체제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걸 이해하려면 우선 북한의 상품가격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북한에선 상품에 세 가지 가격이 매겨집니다. 첫 번째는 국가가 정한 가격입니다. 이건 유명무실해졌죠. 두 번째는 장마당에서 거래되는 암시장 가격입니다. 세 번째가 수출 가격이죠. 문제는 북한에선 월급만으로는 전혀 생활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쌀, 설탕과 같은 식량이나 돈을 더 주는 형식으로 간신히 돌아가죠. 이런 ‘플러스알파’를 줄 수 있는 자금 원천이 수출입니다. 대북 제재는 수출길을 막아버렸어요.”
▶체제 유지에 위협적이라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대북 제재는 해외에 있는 북한 노동자들도 귀환하도록 했죠. 이렇게 되면 민심이 흔들립니다. 더 이상 외화를 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정은 체제는 이걸 최악의 상황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주민들을 배부르게 하지 못하면 체제가 무너진다는 것을 김정은도 알고 있습니다.”
▶남북경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김정은 체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경협을 하는 건 퍼주기에 불과합니다. 남북경협을 통해 한국 경제가 나아지고 한국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건 환상입니다.”
▶그래도 경협을 하면 북한이 개혁·개방을 하고 북한 인민들의 생각이 바뀌거나 김정은 체제가 변하지 않을까요.
“북한에서 살아보지 않아 북한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입니다. 북한 사람들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채 70년 동안 살아왔습니다. 바깥세상을 모르고 저항 심리가 전혀 없습니다. 과거 한국에서처럼 북한에서 민주화 시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부 예외가 있었지만 한국에선 집회에 참여해도 최루탄은 맞아도 기관총은 맞지 않잖아요. 북한에선 기관총을 쏩니다. 그 공포심과 공포정치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릅니다.”
▶북한이 비핵화하리라고 믿으십니까.
“절대로,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북한은 핵을 절대로 놓을 수 없어요.”
▶이유가 뭡니까.
“‘핵 없는 북한’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김정은의 신격화도 할 수 없고, 주민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도 없고, 경제발전 노선도 무너집니다. 국제사회에서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도 없고요.”
▶체제 유지의 핵심이군요.
“미국의 북한 연구자들도 북한에서 핵실험할 때 왜 주민들이 환호성을 지르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북한에선 핵을 체제를 지킬 보검과 같은 존재로 여깁니다. 김정은은 핵무력을 완성하고, 경제도 살리고, 미국이란 거대 국가와 맞서는 ‘빛나는 지도자’로 선전되죠.”
▶북한은 종전선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종전선언은 비록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지만 김정은에겐 자신이 평화를 사랑하는 지도자란 걸 홍보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정상국가 지도자 김정은’이 핵을 보유하는 데 대해선 별 거부반응을 갖지 않게 됩니다. 저는 이 점을 아주 걱정하고 있습니다. 북한도 종전선언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권수립 기념일인 ‘9·9절’에 맞춰 추진하려고 할 겁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를 속전속결로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가 점점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이제서야 조금씩 현실을 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언할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걸 굉장히 강조하고 싶어하니까요. 하지만 그 역시 북한 특유의 ‘저팔계 외교’에 휘말려버렸습니다. 저팔계처럼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얻어먹을 건 다 챙겨먹는 방식의 외교에 당하고 있다고 봅니다.”
▶미·북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북한은 우선 신뢰를 구축한 뒤 비핵화를 주장했습니다. 미국은 비핵화 우선을 요구했지만 ‘싱가포르 합의문’을 보면 북한 뜻대로 선 신뢰 구축, 후 비핵화로 적혀 있습니다. 이 합의문에서부터 꼬여 지금 미국이 비핵화 시간표를 요구하지 못하고 북한으로부터 강도라는 소리를 듣는 겁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과 독대할 때 비핵화 얘기를 거의 안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북한이 폼페이오 장관 방북 이후 미국을 비판하는 담화를 쓴 겁니다. 미국 정부는 북한 쪽 담화에 별도 성명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글엔 글로, 논리엔 논리로 맞받아쳐야 하는데 미국도, 한국도 이게 잘 안 되는 듯합니다.”
▶미국에도 밀리지 않는 북한의 외교력은 어디서 나온다고 봅니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북한 외교관이 10대 시절부터 길러진다는 겁니다. 외교관 지망생을 수뇌부에서 미리 뽑아 청소년 때부터 외국어와 웅변술을 가르칩니다. 협상술은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해 엄격히 지도하죠. 두 번째는 문장 논리입니다. 북한에서 나오는 모든 성명은 수십 명의 외교관이 달라붙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작성합니다. 마지막은 강력한 협업 체제입니다. 핵심 테마에 대해선 외교와 군사 부문의 모든 담당자가 다 달려든다고 보면 됩니다.”
태영호 前 북한공사는…
2년 전 세계를 발칵 뒤집은 '깜짝 망명… 탈북 외교관 중 최고위급
2016년 8월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는 탈북 외교관 중 최고위급에 속한다.
특히 북한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서로 대사를 파견할 정도로 가까운 관계인 영국에서 발생한 북한 외교관의 탈북은 당시 세계 외교가를 발칵 뒤집히게 한 사건이었다.
태 전 공사는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하며 덴마크어 구사도 가능하다. 서유럽 분야를 담당하는 북 한 외무성 8국 소속으로 덴마크, 스웨덴, 영국 등지에서 근무했다. 지난해부터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일하다가 올 5월 사퇴 후 프리랜서로 일하며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는 남북한 정상회담, 미·북 정상회담과 맞물려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는 “두 아들에게 북한 체제 노예의 사슬을 끊어주고 싶었다”고 망명 동기를 밝힐 정도로 가족애가 지극하다고 알려져 있다.
프로필
△1962년 평양 출생 △평양 국제관계대학 국제관계학 △북한 외무성 8국 배치 △주덴마크 북한대사관 서기관 △주스웨덴 북한대사관 서기관 △주영국 북한대사관 공사 △2016년 8월 한국으로 망명△국가안보전략연구원 특임전략자문위원(2017~2018년 5월)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