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10) 자유(自由)
나는 자유로운가? ‘자유(自由)’는 타인의 임의적인 의지와는 상관없는, 독립적인 어떤 것이다. 자유는 타인을 통해 내 생각과 말, 행위가 영향을 받고 결정되는 ‘속박(束縛)’과 대조된다. 노예는 타인의 의지대로 행동한다. 그러나 자유인은 사회가 규정한 법을 어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이 선택한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영국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1906~1997)은 ‘자유의 두 개념’이란 글에서 자유를 두 종류로 구별한다. ‘부정적 자유’는 외부의 압박이나 간섭이 없는 행동이다. ‘긍정적 자유’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자유를 이른다. 자유에는 타인이 내 삶을 간섭하고 주인이 되는 것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소극적인 자유’와 자신이 원하는 삶에 자신을 집중시키는 ‘적극적인 자유’가 있다.
자유란 단어는 기원전 24세기 라가쉬라는 수메르 도시국가의 왕인 우룩카긴나가 사회개혁을 위한 법 조항을 제정하면서 인류에게 처음으로 등장한다. 자유라는 의미를 지닌 수메르 단어 ‘아마-기(ama-gi)’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진 빚을 갚아 구속에서 해방된 상태다.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자유다. ‘아마(ama)‘는 수메르어로 ‘어머니’, ‘기(gi)’는 ‘회복하다; 다시 돌아가다’란 의미다. ‘아마-기’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가 생기는 마음’이란 의미다. 어머니 품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을 표현했다.
자유의지
자유와 밀접하게 관계된 단어가 자유의지다. 그(녀)는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미리 숙고하고, 그 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상상한다. 자유의지는 절제의 힘으로 균형을 잡는다. 예를 들어 내가 오늘 아침 개와 산책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산책이 가져다 주는 개의 건강과 기쁨이 내게도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는 개와 산책한다. 자유는 한 개인의 깊은 생각과 그 생각을 실행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실제 행동으로 옮겼을 때 동반되는 다양한 결과를 감수할 때 생성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소위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숙고다. 최초의 상징적 인간들인 아담과 이브가 ‘선과 악으로 상징되는 지식(知識)의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 먹는다. 이 행위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기초해 한 행위다. 인간은 이 행위를 통해 우주와 자연의 이치인 ‘지식’을 깨닫는다. 4세기 로마 신학자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취한 사건을 ‘원죄’라고 해석했다. 이는 후대 그리스도교의 교리 근간이 됐다. 그러나 선악과 이야기는 오히려 인간의 독립선언이다. 인간은 스스로 선악과를 취함으로써 독립적이며 책임을 지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됐다. 책임을 지지 않는 자유는 만용이며 비겁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들을 ‘운명’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그 원인을 탐정 셜록 홈스처럼 단서의 조각들을 맞춰 추적한다.
책임
오이디푸스는 비극적인 사건들의 원인을 이성적으로 추적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비극을 운명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조금씩 인식한다. 그는 아폴로신이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와 어머니 이오카스테에게 내린 예언과 자신에게 부과한 엄중한 신탁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오이디푸스 왕》은 운명과 자유의지, 신의 섭리와 우연, 닫힌 우주와 열린 우주에 관한 이야기다. 초기 그리스 문학작품에서 인간의 행위는 신의 섭리에 의해 고정된 것이다. 인간은 신의 꼭두각시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아가멤논은 자신의 실수로 아킬레우스의 부하들이 살해된 사건에 대해 사과하는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책임질 수 없다. 제우스신이 책임져야 한다. 운명과 안개처럼 걷는 분노의 신들이 그날 내 마음을 야만적인 기만으로 사로잡아 그런 일이 일어났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신만이 모든 것을 관장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유로운 자다. 그는 자신이 치리하는 테베와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수동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그를 키타이론 산에 버렸다는 목동을 찾아 대화한다. 목동은 자신이 테베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의 갓난아이를 키타이론 산에 버렸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 아이가 부모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마침내 테베에 역병을 가져온 장본인이 자신이란 사실을 깨닫고 애통하게 외친다. “아아, 모든 것이 신탁대로 이뤄졌구나.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 오오, 햇빛이여! 내가 당신을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기를! 나야말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어머니 이오카스테)에게서 태어나,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아내 이오카스테)과 결혼해 죽여서는 안 될 사람(아버지 라이오스)을 죽였구나!”(1182~1185행)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 퇴장가(1223~1530행)는 자신의 남편을 살해한 아들 오이디푸스와 결혼해 자식 넷을 낳은 이오카스테의 자살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보다 더 감당하기 힘든 비탄의 수렁에 빠졌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무대에 올려 아테네 시민들이 보게 한다는 것은 불경한 일이다. 작가 소포클레스는 다만 전령의 입을 통해 그녀의 마음을 전달한다. “마님께서는 미친 듯 현관에 들어서시더니 두 손 끝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시며 곧장 ‘결혼 침대’로 달려가셨습니다. 그리고 방안에 들어가 문을 쾅하고 닫으셨습니다.”(1241~1244행) 이오카스테는 방안으로 들어가 빗장에 밧줄을 매고 목매달아 자살했다.
장님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일들을 운명으로 돌리지 않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는 스스로 장님이 된다. 이 광경도 이오카스테의 자살처럼 무대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관객들은 전령의 연설을 통해 오이디푸스의 눈 자해 소식을 듣는다. “그분(오이디푸스)께서는 왕비(이오카스테)를 보자 큰 소리로 울부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왕비께서 매달려 있던 밧줄을 푸셨습니다. 가련하신 마님께서 바닥에 누우시자, 이번에는 보기에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분께서 마님의 옷에 꽂혀 있던 황금 브로치를 뽑아 드시더니 자신의 두 눈을 푹 찌르셨습니다.”(1265~1269행) 이로써 오이디푸스는 테베인들에게 자신이 테베를 오염시킨 장본인이란 사실을 드러냈다.
장님 예언자는 테베 역병의 원인이 오이디푸스란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 비극을 숨죽여 보고 있던 아테네 시민들도 오이디푸스가 천륜을 거역한 테베의 역병과 불행의 원인이란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는 주인공 오이디푸스만이 자신의 운명을 볼 수 없었다. 오이디푸스는 이제 자신의 무지에 관해 스스로 책임질 행동을 감행하며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이제 너희들은 내가 겪고 있고, 내가 저지른 끔찍한 일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너희들은 봐서는 안 될, 사람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봤으면서도, 내가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앞으로는 어둠 속에서 지내도록 하라!” 오이디푸스는 이 애가를 부르며 어머니의 옷에서 빼낸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여러 번 찌른다. 그가 찌를 때마다 피가 흘러내려 그의 수염을 적신다. 그 피가 얼마나 쏟아져 나왔는지, 전령은 “마치 ‘피의 검은 소나기’ 같다”고 말한다.
오이디푸스가 마침내 무대로 등장한다. 그는 장님이다. 이전에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장님이었지만 육체적으로는 눈이 멀쩡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개안(開眼)했지만, 육체적으로 장님이다. 가면 아래로 쏟아지는 피가 수염과 왕복을 적셨다. 오이디푸스는 더 이상 테베의 왕이 아니다. 그는 더 이상 인간도 아니다. 그는 하찮은 물건이 됐다. 그는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써 자신에게 책임을 물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오이디푸스가 처한 운명에 함께 울었다. 오이디푸스의 다양한 면모를 표현할 그리스 단어가 있다. ‘아고스(agos)다. ‘경외·존경’ ‘오염·저주’ ‘희생양’ ‘거룩’의 의미를 지닌 단어다. 초라한 모습으로 오이디푸스는 퇴장한다.
테베의 원로원으로 구성된 합창대가 아테네 관객들을 향해 노래한다. “테베 시민 여러분, 나의 동족들이여. 오이디푸스를 보십시오. 저분이 자신의 탁월함으로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었던 분이요. 저분이 권력을 잡아 한없는 권력을 휘두른 자요. 누가 부러워하지 않고 그의 행운을 바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보십시오. 얼마나 무서운 공포의 검은 바다가 그를 덮쳤는지.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생의 마지막 날을 지켜보고 기다립시다. 필멸의 인간인 그가 죽기 전에는 행복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가 마침내 고통에서 해방되기 전에는.”(1524~1530행) 아테네 시민은 비극적인 삶을 산 오이디푸스의 입장에서, 혹은 자신의 생을 마칠 미래의 시점에서 자신과 삶을 숙고하기 시작했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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