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번씩 걸어다니며 보폭으로 측정"
문상영 엠프리시젼 대표
'작업 환경' 모두 공개되면 중국 후발업체에만 호재
[ 노경목 기자 ] ‘개별 생산라인의 크기와 배치 순서.’ ‘공개 논란’을 빚고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작업환경측정보고서의 핵심이다. 일부 시민단체 등에서는 “특별히 비밀이 아닌 내용인데 호들갑을 떤다”고 말한다. 1979년 삼성 반도체사업부에 입사한 이래 40년 가까이 관련 산업에서 일하고 있는 문상영 엠프리시젼 대표(사진)의 얘기는 달랐다.
◆땀으로 일궈낸 기적
문 대표는 “그런 내용 하나하나를 알기 위해 삼성전자 엔지니어들은 다른 회사 공장을 수백 번씩 걸어다녔다”고 말했다.
지금은 세계 최강인 삼성전자 반도체지만 1980년대 중반만 해도 일본 도시바와 미국 IBM 등에 밀려 6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일본 샤프에 가서 메모리반도체 양산을 배워오려 했다. 하지만 설비 사용 방법만 가르쳐줄 뿐 라인 배치도 등은 알 수 없었다. 호텔로 돌아온 삼성전자 기술자들은 자신의 보폭을 쟀다. 여러 번 걸음을 걸으며 정확한 길이를 가늠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걸을 수 있도록 연습했다. 문 대표는 “내 보폭은 67㎝였다”며 “다음날부터 공장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설비 배치 위치와 간격을 측정하고, 밤에 돌아와서는 동료들과 그림을 그려가며 배치도를 맞췄다”고 설명했다.
배치도를 뜯어보면서 샤프 기술자들이 어떤 생각으로 공장을 설계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 기술자들은 개선 가능한 아이디어를 덧붙여 삼성전자만의 공정 배치도를 그리는 데 성공했다. 작업환경측정보고서가 공개되면 후발업체들에 얼마나 큰 호재가 될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은 한국 수출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반도체의 시작이 얼마나 미약했는지도 문 대표는 증언했다. 그는 “삼성반도체에서 일한다고 하면 ‘삼성에서 반도(혁대의 일본말)도 만드냐’고 물었다”며 “신입사원 배치를 담당한 인사담당자마저 ‘나도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반도체 소재인 웨이퍼를 영어사전에서 찾으면 ‘얇고 바삭하게 구워 만든 과자’라는 설명만 뜨던 시절이었다. 청계천 책방에서 원서를 뒤지고, 반도체 장비업체들의 영업용 팸플릿을 보며 반도체 공정의 구조를 익혔다.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도쿄 선언’으로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을 때 문 대표가 처음 한 작업은 ‘똥 치우기’였다. 1983년 3월 기흥공장 공사 현장으로 발령받았다. 화장실이 먼 공사 인부들이 미리 설치돼 있던 공조시설로 들어와 용변을 봤다. 후배들을 이끌고 현장에 있는 용변부터 치우는 작업을 했다.
◆1~2년 걸리던 과제 한 달 만에 해결
주 52시간 시대인 2018년에는 생소하지만 현장에서 밤을 새우는 일은 너무 흔했다. 1981년 전자시계용 칩의 수율이 30%를 밑돌 때는 6개월간 공장에서 숙식하며 이를 80%까지 끌어올렸다. 기흥공장에서도 공정 라인에 문제가 생기면 2박3일간 공장에서 지내며 문제를 풀었다. 그는 “사흘을 공장에서 보내고 귀가해 잠들었는데 전화가 와 ‘똑같은 문제가 다시 터졌다’고 하더라”며 “분해서 눈물이 저절로 나고 손이 떨렸다”고 했다. 1986년부터는 당시 인기 토크쇼의 이름을 따 ‘11시에 만납시다’라는 회의가 생겼다. 기술자들이 하도 집에 가지 않으니 “밤 11시에는 회의를 하고 귀가하자”는 취지였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공들여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며 자신감이 쌓였다. 경쟁업체들이 1~2년이 걸리던 과제를 삼성전자 기술자들은 한 달 만에 해냈다. 경쟁업체들은 공급받은 장비의 효율을 95%까지 내면 만족했지만 삼성전자는 이를 110~120%까지 끌어올렸다. 문 대표는 “자신들이 보증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장비를 보며 장비 제조업체들도 놀랐다”며 “장비 제조사로부터 되레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설명했다.
작업환경측정보고서 공개와 관련해 문 대표는 “국가 경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해 기술 유출은 최소화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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