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갑 기자 ]
서양화가 권순익 씨(59)는 경북 문경 탄광촌에 머물던 어린 시절, 햇빛을 받아 빛나는 검은 석탄(흑연)에 매료됐다. 먼발치에서 관망하는 듯한 시선으로 탄광을 곧바로 화첩에 옮기면서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세종대 미대를 졸업한 그는 학이나 연꽃, 호랑이 등 한국 전통문양을 도자기 빚듯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상상력을 가미해 풍경을 비틀어 보기도 했다. 2008년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레지던시(일정 기간 거주하며 창작 활동)를 하던 어느 날, 지중해의 물비늘이 흑연처럼 반짝이는 풍광에 감동받았다. ‘아, 이거다’ 싶었다. 그때부터 흑연을 작품 소재로 활용하며 지중해의 감흥을 재현하는 실험에 돌입했다.
40여 년 동안 고향 문경 탄광의 기억에 심취한 권씨가 미국 뉴욕 화단에 진출한다. 오는 14일부터 한 달간 맨해튼의 유명 화랑 사피라&벤투라 갤러리에서 국내 작가로는 처음 초대전을 펼친다. ‘무아지경’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무채색 바탕에 흑연의 반질반질한 광택과 리듬이 느껴지는 작업은 물론, 아기자기하고 다채로운 색상의 군무로 변화를 모색한 근작 30여 점을 건다. 작품 운반과 기획 등 모든 전시 비용은 화랑에서 지원받았다.
권씨는 뉴욕 화랑의 초대에 “흑연이라는 독창적인 재료로 동양적 정서와 서양적 조형논리를 동시에 소화해낸 게 눈에 띈 것 같다”며 “반짝거리는 흑연의 빛과 한국 고유 오방색의 조화를 꾀한 작품으로 한국 추상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권씨는 50대 초반까지도 국내 화단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2012년 초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문경 탄광에서 늘 봤던 흑연에 착안한 추상화를 내놨다. 점을 찍고, 쌓고, 흑연으로 문질러 빛을 내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 그의 작품은 미국 마이애미, 싱가포르 아트스테이지, 아트파리 등 굵직한 아트페어에서 애호가들을 열광시켰다. 2015년 베네수엘라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은 현지 언론 리뷰 기사가 실릴 만큼 좋은 평가를 얻었다. 우루과이 메리다 근대미술관 등 남미 순회 전시에서도 국제 미술계의 찬사가 쏟아졌다.
권씨의 작업이 해외에서 더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 자신의 작업을 일종의 ‘수련 행위’로 여긴다는 게 권씨의 설명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심경을 표출해내는 것이죠. 이런 과정이 내 작업의 독창성을 만들어낸다고 봅니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우주의 근원이자 조형의 기본인 원과 점 형태에 흑연을 수만 번 문지르고 칠하는 반복 작업에 몰입함으로써 자신뿐 아니라 관람객을 무아의 세계로 이끈다. 제목에는 하나같이 ‘무아(無我)’가 들어있다. “내가 없는 상태를 변주한 지점들을 그린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없음은 때로는 회귀나 그림자로, 때론 신기루, 마음거울로 나타나거든요.”
작업 과정도 이색적이다. 먼저 캔버스에 촘촘하게 모눈을 그리고, 그 위에 점들을 드로잉한다. 점 위에 모래와 아크릴을 섞은 재료를 쌓아 올린 후 굳으면 끊임없이 흑연을 문질러 금속과 같은 짙고 깊은 색감을 만들어낸다. 작가가 입체로 쌓아 올린 평면 위의 점들은 보는 각도에 따라 각기 다른 은은한 색을 뿜어낸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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