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금융시장에 ‘터키발(發) 위기론’이 고조되자 제일 긴장한 나라가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는 페소화(貨) 가치가 떨어질 조짐을 보이자 금리인상이라는 ‘정석 정책’을 폈다. 지난 5월 연 40%로 올렸던 기준금리를 연 45%로 더 올린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금리다. 천혜의 자원조건에도 수시로 경제위기설에 휩싸이는 아르헨티나를 보면, 포퓰리즘 정책의 후유증은 깊고도 길게 간다. ‘페론의 저주’라고 해야 할지….
아르헨티나와 달리 터키는 리라화가 폭락하는 와중에도 금리 처방은 외면하는 분위기다. 고금리에 대한 에르도안 대통령의 부정적 인식이 중앙은행의 독립적 판단을 가로막는 것이다. 엊그제는 메르켈 독일 총리가 “터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점잖게 훈수했다. 한때 ‘월가의 대표적 비관론자’였던 스티븐 로치 예일대 교수 같은 이도 “위기를 막으려면 금리를 올릴 필요가 있다”고 해법을 제시했으나 아직은 요지부동이다.
문제는 인플레이션이다. 터키의 지난달 물가상승률이 연율로 16%에 육박해 금리 처방을 계속 외면하기는 어렵게 됐다. 감내할 수준 이상의 인플레이션은 국가 사회를 피폐시키는 공포의 대상이다. ‘국가권력 아래 가장 신뢰할 만한 것이 화폐’(칸트)라고 하니, 화폐가 제 기능을 못 하면 무정부 국가가 된다. 초(超)인플레이션이 진행되면 자본과 인재의 엑소더스로 사회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베네수엘라는 이 점에서 최악의 반면교사다. 연초만 해도 올해 물가상승률이 1만3000%로 예상됐는데, 최근 IMF는 100만%로 전망했다. 15시간마다 물가가 배로 뛰는 판이니 수시로 빚어지는 정전(停電) 정도는 일상사다. 먹을 게 없어 국민 평균 체중이 10㎏이나 빠진 것도 ‘하이퍼(hyper) 인플레이션’의 한 단면이다.
하이퍼 인플레이션 경고는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는 이란에 대해서도 나왔다. 이란 중앙은행은 지난달 물가상승률이 연율로 10.2%라고 발표했으나, 암달러 시장 환율 등을 감안할 때 200%가 넘을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2008년 짐바브웨, 1921년 바이마르공화국의 전설 같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또 어디서 되풀이될지 모른다.
인플레이션은 보이지 않고, 저항할 수도 없어 ‘침묵의 세금’이다. 정부가 개입하는 ‘정책 환율’과도 유사점이 많다. 물가상승률은 실업률과 더불어 ‘고통 지수(misery index)’라고도 하지만, 일본은 딴판이다. 일본은 5년째 ‘물가상승 2% 달성’이 중앙은행의 목표일 정도로 아직도 디플레이션 국면이다. 국가 간의 극심한 양극화다. ‘폭염으로 생활물가가 뛴다’는 기사를 보니 불황에 물가는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 경제에 어른거리는 건 아닌지 겁난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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