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별미던 냉면 여름음식으로 자리잡은 까닭은

입력 2018-08-20 18:00  



(윤정현 문화부 기자) “꽁꽁 언 김치죽을 뚜르고 살얼음이 뜬 진장김칫국에다 한 젓가락 두 젓가락 풀어 먹고 우르르 떨려서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 평양냉면의 이 맛을 못 본이이요. 상상이 어떻소!”

김소저 작가가 1929년 ‘별건곤’에 쓴 글입니다. 다산 정약용이 황해도 서흥 도호로 부임하는 친구에게 장난하듯 써준 시에도 눈이 한자나 쌓인 겨울 방안에서 노루 고기와 냉면을 먹는 모습이 나온다 합니다. 실학자 유득공이 박지원 등과 함께 평양을 여행하고 지은 ‘서경잡설’에는 “가을이면 냉면과 돼지 수육 값이 오르기 시작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출판사 가갸날에서 펴낸 신간 《평양냉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평양에 냉면이 유행했고 겨울에 즐겨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세기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즐겨먹은 냉면이지만 겨울 별미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냉면이 더운 여름에 즐겨먹는 음식으로 다시 태어난 것일까요. 옛날에도 더운 여름에 시원한 냉면을 먹어야 제맛이 아니었을까요. 알고 보면 이유는 단순합니다. 안 먹은 것이 아니라 못 먹은 거니까요. 냉장 기술이 없던 시절에는 여름에 차가운 육수의 냉면을 먹을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서울과 인천 부산 등을 중심으로 19세기 말 개화의 물결이 밀려듭니다. 냉면의 중심지 평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10년초 평양 대동문 앞에 2층짜리 냉면집이 생긴 이후 수십 곳의 냉면집들이 들어서면서 냉면 거리가 생겼습니다. 책에서는 “1925년 평양 냉면집에서 일하는 노동자만 3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평양을 주름 잡았던 평양냉면은 1910년대말 서울로 진출했습니다. 서울 인구도 급증하던 시기였습니다. 1910년대 초 30만명이던 인구가 1930년대 중반 70만명으로 늘었으니까요. 설렁탕 외엔 이렇다할 외식거리가 없던 서울에서도 평양냉면은 이름을 떨쳤습니다.

평양냉면이 서울에 진출한 이후 ‘냉면=겨울 음식’이라는 공식은 깨졌습니다. 사철 어느 때고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자리잡았고 오히려 더운 여름을 대표하는 음식이 됐습니다. 얼음을 구할 수 있어 한여름에도 차가운 육수를 만들 수 있게 돼서입니다. 부산을 중심으로 어업이 발달한 항구도시부터 얼음공장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얼음은 차츰 냉면집에 공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비싼 냉장고였지만 고기를 우려낸 육수를 사용하던 냉면집에서 식중독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바람에 모든 냉면집에는 냉장고를 설치하라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합니다.

이밖에도 순종도 배달시켜 먹던 냉면, 일제 식민 치하에서 MSG가 냉면에 들어가게 된 과정 등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시와 소설, 수필 등에 등장하는 냉면의 맛을 책으로 느껴볼 수 있습니다. 냉면을 좋아해 스스로를 ‘평뽕족(평양냉면을 중독될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칭하고 냉면집 순례가 취미인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냉면의 역사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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