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호철이 쓴 《서울은 만원이다》의 배경인 1966년 서울 인구는 9개 구(區) 380만 명에 불과했다. 지금 보면 아담해 보이지만 1955년 157만 명에서 2.4배로 급팽창했으니 ‘만원(滿員)’이라 부를 만했다. 콩나물 교실, 초만원 버스, 명절 서울역 인파 등은 그 시절 흔한 풍경이었다.
당시 서울은 사실상 강북뿐이었다. ‘마을 리(里)’가 붙는 지명은 청량리 미아리 수유리 등 강북에만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의 강남 일대를 일컫던 ‘영동(永東)’이란 지명도 1973년 성동구 영동출장소가 생기면서 나왔다. 영등포에서 이 지역까지 별다른 주거지가 없어 ‘영등포의 동쪽마을’로 불린 것이 유래다.
반세기 동안 강북은 크게 변했다. 그러나 문자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인 강남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현재 강북 14개 구 인구는 488만 명으로 100만 명 남짓 늘었을 뿐이다. 1000만 인구의 절반은 강남 11개 구가 신설되고 인구가 유입된 결과다.
서울의 확장은 곧 강남·북 격차로 귀결됐다. 논밭을 갈아엎는 개발과 밀집된 구도심의 변신이 같을 수 없었던 탓도 있다. 강북은 산·구릉이 많고 층고 제한, 역사 유적, 좁고 굽은 도로 등 걸림돌이 적지 않다. 문제는 반세기 동안 자원의 ‘강남 쏠림’이 과도했다는 데 있다.
강남·북의 경제·문화·생활 인프라 격차는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지하철 2·3·7·9호선과 분당·신분당선이 관통하는 강남구는 어디 가나 역세권이다. ‘몰(mall)세권, 학세권’이란 신조어까지 나왔다. 반면 강북에선 웬만하면 마을버스로 10~20분을 나가야 지하철역에 닿는다. 분당과 일산의 확 벌어진 격차도 인접한 송파구와 은평구의 차이를 반영한 셈이다.
이 때문에 역대 서울시장마다 뉴타운 등 강북 개발공약을 내세웠지만 큰 효과를 내진 못했다. 사업성·경제성이 문제였다. 그래도 몇 해 사이에 뜬 북촌 서촌 경리단길 중리단길 같은 핫플레이스는 죄다 강북 골목길이다. ‘직선형’ 강남과는 판이한 ‘곡선형’ 골목길의 재발견에서 ‘강북 르네상스’의 조짐도 엿보인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그제 ‘옥탑방 한 달살이’를 마치고 강북 우선투자 구상을 밝혀 논란이 분분하다. 1조원의 특별회계를 편성해 강북 교통·주거·도시계획 등에 집중 투입하겠다고 한다. “환영한다”는 기대와 “보여주기식 쇼”라는 비난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그의 말마따나 ‘기울어진 운동장’의 균형을 잡을 필요는 있다. 그러나 수조원의 재원 마련, 부동산 가격 급등 등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시각도 많다.
임기 내내 ‘토건사업’을 비난하고 텃밭, 협동조합에 주력해 온 박 시장이 “강북을 강남처럼 개발하겠다”니 시민들이 의아해할 만하다. 1000만 도시의 의미를 깨달은 변신인지, 정치적 행보인지 두고볼 일이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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