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우리말로 풀면 "더위, 물렀거라!"쯤 되는 셈이다.
여기서 다시 '머물러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의미가 확장돼
거처, 처소 등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이게 됐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기록적 폭염이었던 올여름 무더위도 다 끝났다.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가을 분위기가 제법 느껴진다. 절기상으론 이미 처서(處暑·8월23일)를 지났다. 처서는 한자로 ‘곳 처(處), 더울 서(暑)’다. 누구나 아는 절기 이름이지만, 이 말의 뜻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더위가 그친다는 뜻으로, 이맘때가 되면 무더위가 물러나고 선선한 기운을 느낀다는 데서 붙여졌다.
‘처(處)’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은 모습
處는 보통 처소(處所) 등 ‘곳’으로 새기는 게 대표적인 훈(訓)이다. 그런데 더위가 물러난다는 뜻의 말에 왜 이 ‘처’가 쓰였을까? 한자의 유래를 알면 좀 더 이해하기 쉽다. 處는 호랑이()가 뒷발()을 꿇은 채 웅크리고 앉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본래 ‘(날쌔게 움직이는 호랑이가)멈추다, 머무르다’란 뜻에서 시작됐다(하영삼, ‘한자어원사전’).
처서는 곧 ‘더위가 머무르다, 그치다’란 뜻이다. 순우리말로 풀면 “더위, 물렀거라!”쯤 되는 셈이다. 處는 여기서 다시 ‘머물러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의미가 확장돼 거처, 처소 등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이게 됐다. 말이나 행동이 경솔한 사람을 가리켜 “채신머리없게 굴지 마라”라고 한다. ‘채신머리없다’는 ‘채신없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이 말도 한자 處와 관련이 있다.
어근 ‘채신’은 지금은 완전히 굳어져 고유어처럼 쓰이지만 본래 ‘처신(處身)’이 변한 말이다. ‘처신’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져야 할 몸가짐이나 행동을 말한다. 매우 부끄러울 때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하는데, 이때의 ‘몸 둘 바’가 곧 처신이다.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처신없다’고 했는데, 이 말이 변해 지금은 ‘채신없다’가 됐다. 자칫 ‘체신없다/체신머리없다’로 쓰기 쉬우니 주의해야 한다.
복날·삼복…말 속에 더위 이기려는 의지 담겨
삼복(三伏: 초복, 중복, 말복)이나 복더위, 복날은 모두 한여름 무더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통적으로 든 한자 伏은 ‘엎드릴 복’자다. 사람(人) 옆에 엎드린 채 집을 지키는 개(犬)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 말이 더위를 상징하는 데 쓰이게 된 데는 유래가 있다.(도움말: 김영봉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초복은 하지(夏至·올해는 6월21일)를 지난 뒤 셋째 경일(庚日)에 든다. 천간이 세 번 도니 하지에서 30일 뒤다. 역법에서 경은 오행상 가을 기운의 상징이다(천간 중 갑을이 봄, 병정이 여름, 무기가 늦여름, 경신이 가을, 임계가 겨울에 해당). 이때쯤이며 가을 기운이 “여름이 물러났나?” 하고 처음으로 머리를 살짝 내민다. 하지만 곧 “앗 뜨거워” 하면서 도로 납작 엎드린다. 그래서 초복(7월17일)이다. 중복(7월27일)도 마찬가지다. 열흘 뒤 둘째 경일에 “이젠 진짜 덥지 않겠지” 하고 가을이 고개를 들다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더위에 기가 팍 죽어 주저앉는다.
초복 중복에서 두 번의 좌절을 겪은 가을 기운은 이번엔 안전하게 입추(立秋·8월7일)를 지나서 온다. 그것이 말복(8월16일)이다. 중복 다음 말복은 보통 열흘 뒤에 들지만 간혹 그 사이가 20일로 벌어질 때가 있다. 말복은 하지가 아니라 입추를 기준으로 해 첫 번째 경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복과 말복 사이가 길어지면 이를 ‘월복(越伏)’이라고 한다. 이런 때는 그해 여름이 유난히 길고 덥게 느껴진다. 올해가 월복이었다.
‘복날’에 가을이 납작 엎드렸다가 ‘처서’에 드디어 가을이 더위를 이겼으니, 글자에 담긴 조상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hymt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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