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비주류 만세

입력 2018-08-28 18:00  

고두현 논설위원


“태극 마크 한 번 못 달아 본 사람이 무슨 대표팀 감독이냐.” 2018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김학범 감독(58)은 그라운드의 난적들보다 이런 편견과 먼저 싸워야 했다. 오랜 무명 시절을 보냈고 프로무대도 밟아보지 못했으니 그럴 만했다.

그의 선수 경력은 명지대 졸업 후 국민은행팀에서 뛴 게 전부다. 국가대표도 못해 봤다. 32세에 은퇴 후 은행원으로 일했다. 43세 때 성남 일화 감독을 맡아 팀을 K리그 정상에 올렸지만 대표팀을 맡기까지 힘든 길을 걸었다. 2007년 사령탑 후보로 거론됐을 때도 국가대표 선수 경력이 없는 ‘비주류’여서 탈락했다.

‘공부하는 지도자’로 변신한 그는 유럽과 남미로 날아가 선진축구를 연구했다. 명지대에서 국내 1호 축구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답게 치밀하게 전략과 전술을 분석했다. 이번 아시안게임 감독에 선임된 것도 대회 참가 24개국 전력을 철저히 분석한 프레젠테이션 덕분이었다.

올해 2월 사령탑을 맡은 뒤에는 성남 감독 시절 선수였던 황의조를 와일드카드로 뽑아 ‘인맥축구’ 논란에 휩싸였다. 그는 “선수 선발에 학연·지연·의리는 없다. 나도 이런 거 없이 살아남았다”며 구구절절 설명했다. 황의조가 이번 대회 8골을 뽑으면서 이를 입증했지만 당시에는 ‘비주류의 설움’을 곱씹어야 했다.

베트남 축구에 ‘마술’을 일으킨 박항서 감독(59)도 이런 아픔을 겪었다. 국가대표로 빛을 보지 못한 그는 2002월드컵 때 대표팀 수석코치를 지낸 뒤 대표팀 감독에 선임됐지만, 부산아시안게임 동메달 후 경질됐다. 경남 FC와 전남 드래곤즈 감독에서도 밀려났다.

야인 시절을 보내면서 그는 ‘이제 퇴물이 되는구나’라는 위기의식에 시달렸다. 58세에 마지막 도전으로 택한 것이 베트남행이었다. 그곳에서도 ‘축구 변방’ 출신이어서 마음고생을 했다. 벤치에서 조는 듯한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면서 ‘슬리핑 원(sleeping one)’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영국 프로축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주제 모리뉴 감독의 별명 ‘스페셜 원’에 빗댄 조롱이었다.

하지만 그는 선수 개개인의 강점을 철저하게 파악해 자신감을 불어넣고, 최적의 작전을 구사하면서 ‘승리 방정식’을 찾아냈다. 경기 중에는 엄한 호랑이지만, 평상시에는 선수들과 스킨십을 높이는 ‘파파 리더십’으로 호감도를 높였다. 3개월 만에 대표팀을 국제 무대 결승까지 끌어올린 그는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첫 4강 진출 신화를 썼다.

29일 저녁 비주류 출신의 두 감독이 아시안게임 준결승에서 맞붙는다. 시련 속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명장들의 대결이니만큼 누가 이기든 명승부가 되리라 믿는다.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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