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미식여행
1980~1990년대 홍콩은 다양한 색깔로 기억된다. ‘바바리 코트’와 선글라스, 입에 문 성냥, 저우룬파(周潤發)와 류더화(劉德華), 장궈룽(張國榮)으로 이어지는 홍콩 누아르 영화 속의 이미지는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은밀한 코드 같은 것이다. 홍콩영화의 황금기는 지나갔지만 그때의 향수를 간직한 홍콩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센트럴과 침사추이의 뒷골목을 걷다 보면 마치 그 시절 홍콩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장궈룽이 좋아했던 광둥식 레스토랑부터 저우룬파의 단골식당까지 추억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
저우룬파의 단골 맛집 ‘팀 초이 키’
저우룬파가 즐겨 찾은 식당들은 카오룽 반도 카우룽 시티에 모여 있다. 카우룽 시티는 1998년까지 옛 홍콩 국제공항이 있던 곳이다. 시내 한가운데 있는 독특한 구조 때문에 착륙할 때마다 아슬아슬한 기분을 만끽했던 공항이었다. 도심 한가운데 공항이 있다 보니 신선한 식재료로 만든 맛있고 값싼 식당이 많았다. 저우룬파의 단골집 중 하나인 팀 초이 키도 그중 하나다. 1948년 처음 문을 연 뒤 3대에 걸쳐 운영하고 있는 식당이다. 완탕, 콘지, 장펀, 포크찹 등 홍콩의 서민 음식을 대표하는 메뉴가 다채롭게 마련돼 있다. 저우룬파가 즐겨 먹은 요리는 ‘뎅짜이 콘지’와 ‘야오티우 장펀’이다. 뎅짜이 콘지는 ‘어부들의 죽’이라는 별명이 붙은 요리인데, 돼지 껍데기와 오징어, 소고기, 땅콩 등을 넣어 죽으로 끓인다. 팀 초이 키의 콘지는 다른 식당과 달리 3시간 이상 푹 끓여내기 때문에 식감이 부드럽고 풍미가 진하다. 야오티우 장펀은 튀김 과자를 쌀 전병으로 돌돌 만 뒤 간장을 뿌려 먹는 일종의 딤섬이다. 과자의 바삭바삭한 식감과 전병의 부드러운 감촉이 근사하게 어울린다. 홍콩 어디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흔하고 저렴한 메뉴들이지만, 옛 조리법을 고집스럽게 고수한 덕분에 저우룬파를 비롯한 홍콩 식도락가들이 먼곳에서도 찾아오는 식당이 됐다.
120년 역사의 보양식 요리집 서웡펀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주변, 소호 한복판에 있는 식당 서웡펀은 12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다. 1895년 중국에서 처음 문을 연 뒤 1940년대 홍콩 센트럴로 옮겨온 서웡펀의 대표 요리는 바로 뱀탕이다. 뱀탕은 중국 남부 지역에서 인기 높은 전통 보양식이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겨울의 으슬으슬한 추위를 버티기 위해 뱀탕을 먹었다. 뱀뼈와 닭뼈, 돼지뼈를 24시간 동안 곤 수프에 신선한 뱀 고기와 진피, 생강을 넣어 끓여낸다. 뱀 고기는 중국 저장성의 양식장에서 철저한 위생 관리를 통해 들여온다. 모험적인 보양식에 큰 흥미가 없다 해도 서웡펀은 한 번 들러볼 만한 가치가 있는 식당이다. 9년째 미쉐린 빕 구르망 맛집으로 선정될 정도로 요리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파인애플 소스의 탕수육, 오리 덮밥, 진피와 향초로 끓여낸 녹두죽 등 맛있는 홍콩 전통 메뉴를 다채롭게 갖췄다. +852 2543 1032
장궈룽이 감탄한 광둥음식점, 푹람문
장궈룽이 언론 인터뷰에서 “그곳 음식을 좋아해요. 가격이 비싸서 매일 가지는 못하지만요”라고 말했던 식당이 푹람문의 완차이 본점이다. 홍콩사람들은 푹람문을 두고 ‘부자들의 카페테리아’라고 부른다. 1972년 문을 연 이후 고위 정치인과 홍콩의 재벌들, 톱스타 연예인이 즐겨 찾는 식당이기 때문이다. 고가의 자동차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셀레트리티의 근황을 담으려는 파파라치도 출몰할 정도다. 가격이 높을까 지나치게 겁먹을 필요는 없다. 맛에 비해 합리적인 가격대 음식이 많다. 딤섬 런치 메뉴도 여행자가 충분히 감당할 만한 가격이다. 푹람문에서는 광둥 가정식의 전통을 고수하며 아주 훌륭한 요리를 낸다. 새콤하게 버무린 목이버섯, 입안에서 살살 녹은 ‘푹람문 스페이머스 크리스피 치킨’, 달콤한 차슈 바비큐 등의 섬세한 풍미는 매력적이다.
최고 가성비, 백종원이 사랑한 포장마차 오이만상
도시에 밤이 찾아온다. 황혼마저 사라지고 어둠이 내리면 거리 분위기는 완전히 변한다. 삼수이포의 다이파이동 오이만상은 그제서야 손님이 앉을 테이블과 의자를 꺼낸다. 다이파이동은 노천식당을 일컫는 광둥어다. 홍콩의 다이파이동은 저녁 무렵 상점들의 셔터가 닫히면 그 앞에 좌석을 펼쳐놓고 요리를 낸다. 1956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오이만상은 홍콩 5대 다이파이동으로 꼽히는 곳으로,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에서 요리연구가 백종원이 맥주와 음식을 즐겼던 식당이기도 하다. 백종원의 선택을 따라 마늘 플레이크를 듬뿍 넣은 게 볶음과 소고기 간장볶음을 주문해보자. 60~130홍콩달러(HKD) 정도면 다양한 메뉴를 실컷 즐길 수 있다.
홍콩산 수제 맥주의 풍미 더 에일 프로젝트
몽콕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난 한적한 골목, 홍콩 크래프트 비어의 천국이 애주가의 발길을 기다린다. 더 에일 프로젝트는 에일 애호가부터 젊은 힙스터, 동네 주민이 유쾌하게 어울리는 펍이다. 반바지를 입거나 슬리퍼를 신고 가도 상관 없을 정도로 편안한 분위기다.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홍콩산 수제 맥주의 풍미다. 쓰촨 후추를 사용한 흑맥주부터 오미자로 맛을 낸 에일까지, 홍콩 크래프트 비어의 상상력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하나만 고르기 아쉽다면 3종의 맥주를 함께 맛볼 수 있는 맥주 플래터를 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아시아 각국의 전통 요리에서 영감을 얻은 샌드위치들이 기막히게 맛있으며, 거위알 노른자 크러스트를 올린 감자 튀김 또한 별미다
매력적인 칵테일이 가득한 룸309
룸309는 세련된 부티크 호텔 더포팅어의 ‘존재하지 않는 바’다. 포팅어 호텔은 한 층에 오직 여섯 개의 객실만 운영하기 때문에 309호라는 룸 넘버는 존재할 수 없다. 그 이름처럼 룸309는 호텔 복도의 정체 모를 철문 안에 숨어 있다. 호텔의 또 다른 바 엔보이(Envoy)에서 카드 키를 받은 뒤 룸309의 문을 연다. 바깥에서는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던 어둡고 화려한 바가 갑자기 등장한다. 길죽한 실내를 따라 늘어선 바 좌석에 앉으면, 특별한 칵테일들을 맛볼 수 있다. 이곳의 시그니처 칵테일은 투명한 색이다. 진토닉처럼 원래 투명한 칵테일이라면 별다를 게 없겠지만, 불투명한 피나 콜라다나 어두운 갈색의 올드 패션드 등 원래 색이 짙은 칵테일만 골라 투명하게 완성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비결은 바나나, 피넛 버터, 요거트 등의 부재료를 원주와 함께 증류해 풍미를 불어넣는 것. 바의 이름부터 칵테일의 레시피까지 홍콩 최고의 바텐더로 공인받은 안토니오 라이의 작품이다.
홍콩식 분식집 취화 레스토랑
홍콩의 나이트 라이프를 상징하는 란콰이펑의 길목, 24시간 운영하는 차찬탱이 한 곳 있다. 차찬탱은 차와 간단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식당을 뜻하는데, 홍콩식 분식집이라고 이해해도 좋겠다. 웰링턴 스트리트의 취화 레스토랑은 파티를 즐기거나 술을 마신 뒤 허기를 해결하고 가려는 사람들로 늦은 시각까지 붐빈다. 완탕면, 참깨 소스를 뿌린 토마토 샐러드, 간단한 파스타, 피시볼 수프, 다양한 토핑을 올린 국수, 햄과 치즈를 끼운 토스트까지 취화의 메뉴는 무척 다양하다. 내가 원하는 메뉴로 해장한 뒤 호텔에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센트럴 근처에서 ‘술집 호핑’을 마친다면, 취화에서 야식을 즐겨보는 것을 잊지 말자.
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
여행메모
◆제10회 홍콩와인&미식 축제= 10월 25일부터 28일 사이 홍콩 와인과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홍콩 와인앤 다이닝 페스티벌(Hong Kong Wine & Dine Festival)이 10월25~28일 빅토리아 하버와 항구 산책로 일대에서 열린다. 포브스가 ‘세계 10대 미식 축제’로 선정한 홍콩 와인과 음식 축제는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올해 홍콩 와인과 음식 축제는 450여 이상의 와인 부스와 음식 부스, 컨셉트 스토어, 스페셜 커피 시음관과 엔터테인먼트 존이 들어선다. 축제 기간 세계적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만점을 준 최고의 와인이 공개되며 사케와 싱글 몰트 위스키, 크래프트 비어도 마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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