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기울어진 저울

입력 2018-09-12 18:26  

고두현 논설위원


[ 고두현 기자 ] 법원의 상징물인 ‘정의의 여신상’은 저울과 칼을 쥐고 있다. 두 눈은 안대로 가리고 있다. 저울은 공평, 칼은 정의, 안대는 공정을 상징한다. 불의에 굴하지 않고 어느 쪽도 편들지 않으면서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의미다. 이 조각상은 서구 대부분의 법원 앞에 서 있다.

우리나라 대법원에도 있다. 차이점은 한복 차림에 칼 대신 법전을 들고 눈은 뜬 채 앉아 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눈을 떴으니 완벽한 공평을 기대할 수 없고, 법조문만 읊조리는 책상물림 법관일 뿐”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서양 것이든 동양 것이든, 눈을 가리든 않든, 칼이 있든 없든 공평무사한 법정신의 표상인 것은 틀림없다. 세계 최초의 성문법전인 ‘함무라비 법전’이 기원전 1750년 무렵에 나온 이래 한동안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으로 처벌하는 ‘탈리오 법칙’이 재판에 적용됐다.

증거 중심의 판결이 도입된 시기는 약 200년 전이다.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법관이 재판권을 갖고 고문이나 자백보다 증거를 중시하는 원칙을 확립하기까지 오랜 기간이 필요했다. 현대에 와서는 유·무죄가 의심스러운 경우 무죄를 선고하는 무죄추정의 법리가 확립돼 있다.

그런데도 ‘정치재판’이니 ‘여론재판’이니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검찰의 무리한 기소와 구속 남발에 제동을 걸 곳은 법원밖에 없다. 그나마 법원에서 무죄판결 비율이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다. 부실기업 인수 혐의로 기소된 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이 1·2심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배임 등의 혐의를 받은 이석채 전 KT 회장도 무죄가 확정됐다.

개념이 모호한 직권남용죄의 무죄율도 높다. 외환위기 직후 구속된 강경식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과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1·2·3심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주요 방위산업 비리 사건으로 구속기소된 36명 중 16명이 2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다만 정치적 상황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고무줄 판결’이나 이념적 편향에 대해서는 비난 여론이 높다. 법관의 청렴과 공정성에 대한 자질 시비도 자주 불거진다. 수석부장판사인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그제 인사청문회에서 8차례의 위장전입과 세금 탈루 의혹으로 공분을 샀다. 법관 스스로 형평과 정의를 잃으면 법이 설 자리가 없다.

오늘은 ‘세계 법의 날’이자 ‘대한민국 법원의 날’이다. 1948년 9월3일 미군정으로부터 사법권을 이양받고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취임한 사법부 탄생 70주년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법원이 ‘기울어진 저울’ 소리를 듣는 일이 없어야 한다. 파스칼은 “정의 없는 힘은 무력(武力)이고, 힘 없는 정의는 무력(無力)하다”고 했다.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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