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20) 개인의 탄생
테베에 돌아온 안티고네
'반역자'의 매장을 금지시킨
삼촌 크레온 왕 명령 어기고
오빠 폴리네이케스 땅에 묻어
도시와 국가가 정한 법령과
가족 안에 형성된 사랑 사이
자신의 결정을 선명하게 선택
철학자 헤겔에게 '안티고네'는
"인간의식의 진보이자 도약"
국가권력·개인 인권의 갈등이
근대정신을 탄생시킨 씨앗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1인칭인 ‘나’를 2인칭인 ‘너’와 불특정 다수인 3인칭 ‘그(녀)’로부터 구분하는가? 나는 우연히 태어난 한국이란 국가의 국민이다. 국가, 도시, 가문과 같은 공동체는 자신들을 다른 공동체와 구분하고 구별시키는 특징들을 인위적으로 만든다. 이 특징들은 헌법, 관습, 규칙, 도덕과 같은 것들이다. 나는 ‘나’라는 정체성을 허락한 커다란 틀 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가? 나는 그 틀 밖에서 나를 만들 수 있는가? 내 공동체는 자유의지로 구축한 나를 포용할 것인가, 혹은 억압할 것인가?
‘나 자신을 위한 노래’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1819~1892)은 미국인들에게 가장 자신다운 정체성을 시로 발표했다. 그는 빈농인 아버지와 퀘이커 교도였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초등학교 5~6년 교육이 그가 받은 정규 교육의 전부였다. 휘트먼은 11세부터 병원과 인쇄소, 신문사, 법률사무소 등에서 사환으로 일하면서 인류의 고전과 경전에 심취해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했다. 그 세계관은 후에 미국의 세계관이 됐다. 그는 미국과 미국인의 좌표를, 36세가 되던 해인 1855년 첫 시집인 《풀잎》에 담았다.
《풀잎》에 실린 첫 시 ‘나 자신을 위한 노래(Song of Myself)’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나 자신을 찬양합니다. 내가 지닌 것을 당신도 지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게 속한 모든 원자(原子)가 당신에게도 속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빈둥거리며 내 영혼을 초대합니다. 나는 (땅에) 기대어 편안히 빈둥거립니다.(…) (그러다) 여름 풀잎을 관찰(觀察)합니다.”
휘트먼은 서양 서사시 전통의 운율 형식을 따라 노래를 시작하지만 그 내용은 파격적이다. 그는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처럼 뮤즈 신을 불러내거나 이스라엘 시인 다윗처럼 신을 들먹이지 않는다. 그에게 뮤즈이자 신은 바로 ‘자신’이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자기 자신, 예루살렘의 성전과 같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 예배를 드린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타인도 함께 소유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와 너를 구별하는 계층, 계급, 이념, 성별, 소유란 경계가 허물어졌다. 이 새로운 ‘민주적 자아’가 팽창해 2인칭과 3인칭 그리고 우주 전체를 포함하는 그릇이 된다. 그에게 미국이란 국가는 심오한 자기의 확장이며, 그런 개인들의 집합체다.
비극 《안티고네》
휘트먼의 ‘나 자신을 위한 노래’가 등장하기 2296년 전인 기원전 441년에 그리스 비극작가 소포클레스는 자신을 심오하게 관찰하고 찬양하는 비극 작품을 썼다. 바로 《안티고네》다. 안티고네는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의 딸이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해 낳은 자식이다. 소포클레스는 이 모순과 결핍, 터부의 결정체인 안티고네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당시 소포클레스는 페리클레스와 함께 사모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선출된 아테네 아홉 장수 중 하나였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필가와 철학자들은 탁상공론만 일삼는 유약한 지식인이 아니었다. 대부분 치열한 삶을 살았던, 특히 전투에 참전한 군인이거나 장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소포클레스가 아테네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비극 작품 《안티고네》가 거둔 성공 때문이었다.
오이디푸스는 콜로노스에서 죽었다. 안티고네와 여동생 이스메네는 그들의 오빠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를 만나기 위해 테베로 향한다. 오빠들이 테베의 왕권을 놓고 싸우다가 둘 다 전사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안티고네가 테베에 도착했을 때, 두 오빠는 이미 사망했다.
안티고네의 삼촌 크레온은 테베의 왕이 된 후,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첫 번째 칙령을 내린다. 반란을 일으켜 테베를 공격한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이기 때문에 매장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크레온이 내린 국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고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한다. 이 사건은 아테네라는 도시국가를 구성하는 개인의 의무와 권리에 대한 은유다.
《안티고네》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미 고전(古典)이 됐다. 고대 그리스의 가장 뛰어난 정치가이자 웅변가인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44~322)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크레온의 연설을 직접 인용하며 자신의 정적인 아이스키네스(기원전 389~314)를 공격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저서 《정치학》에 이 작품을 인용하며 정치철학의 근간을 설명했다. 《안티고네》는 서양의 근대정신을 구축하는 뿌리가 됐다.
헤겔의 평가
19세기 유럽의 시인과 철학자, 학자들은 근대정신을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 찾았다. 그들은 《안티고네》가 그리스 비극의 백미(白眉)일 뿐만 아니라 인간정신의 최선을 구현한 가장 완벽한 작품이라고 칭송했다. 특히 독일 철학자 헤겔(1770~1831)은 이 작품을 통해 칸트의 이념과 현실이라는 이원론을 극복하는 철학적인 세계관을 제시했다. 헤겔은 이 비극을 “인류의 가장 숭고한 작품이자 인간의 노력으로 완성된 모든 면에서 가장 완벽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안티고네》는 인간 의식의 진보이자 도약이다. 헤겔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국가권력과 개인 인권의 충돌 및 갈등이 근대정신을 탄생시키는 씨앗이었다고 해석했다.
이 작품에서 크레온이 상징하는 ‘국가권력과 법’과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안티고네의 ‘본능적이며 사적인 사랑과 의무’가 충돌한다. 헤겔에게 이 충돌은 더 높은 차원의 ‘정신’을 구축하는 발판이다. 안티고네는 이 충돌을 마다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획득하려는 인간은 항상 비극적이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인 도시 및 국가가 정한 법과 개인이 속한 가족 안에서 형성된 양심이 만들어낸 위험하고 모호한 경계 안으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영국 문학비평가 조지 스타이너(1929~)는 헤겔의 해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로 이 위험천만하고 파괴적인 지점이 인간을 탁월하게 만들며, 인간의 의식과 영혼을 고양시켰다. 안티고네는 죽음에 이르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의식적으로 행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안티고네는 법과 양심의 갈등 속에서 자신이 지닌 명료함과 순수함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오래된 신화와 구태의연한 종교가 표현하는 가시적이며 정체가 분명한 신들을 넘어선, 비가시적이며 추상적인 원칙을 상징하는 신들을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소개한다.”
헤겔의 이분법적인 도식과 해석엔 약점이 있다. 크레온을 국가의 권력으로, 안티고네를 개인의 양심으로 쉽게 구분한다. 하지만 안티고네가 상징하는 가치는 국가와 개인, 법과 양심을 초월하는 어떤 가치다. 소포클레스는 그 가치가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그 안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행복을 보장한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5세기 ‘도시’는 종교와 정치가 어우러지는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공간이었다.
개인의 탄생
우리는 흔히 《안티고네》를 자신의 양심대로 행동하는 한 개인이 국가라는 비인간적이며 잔인한 권력에 맞서 투쟁하는 내용으로 해석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에 등장한 ‘국가’라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이념에서 출발했다. 국가는 그 구성원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는 개인들의 자율 공동체다. 그러므로 개인과 국가 간의 ‘사회계약’이 국가의 운명과 개인의 안녕을 위해 중요하다.
안티고네를 주인공으로, 크레온을 악당으로 여기는 해석은 지난 300년간 서양에서 지속돼온 문학적이며 철학적인 전통이다. 그러나 소포클레스가 정말 헤겔식의 이원론적인 주제를 아테네 시민들에게 고취하려 했을까? 기원전 441년 디오니시아 축제를 관람하기 위해 원형극장에 자리를 잡고 이 비극공연을 감상하던 아테네 시민들은 크레온을 국가권력이며 악의 축으로 치부했을까?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극 중 대결이 아테네인을 흑백 진영으로 나눴을까? 안티고네의 행위는 자신의 양심보다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고대 관습을 단순히 지키려고 노력한 것은 아닐까? 이 두 인물 사이에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소포클레스가 상상한 민주주의의 근간은 무엇인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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