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해져가는 힌두제국의 흔적들…
거대한 탑만이 그날의 영광 보여주네
1336년 힌두교도가 세운 '비자야나가르' 왕국
이슬람에 의해 멸망한 뒤 남인도에 유산 남아
예술성 돋보이는 석조건축물 방치된 채 폐허화
광야·신전 오가며 순례자의 발길 끝없이 이어져
우리가 보통 ‘인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힌두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힌두교’ 하면 ‘인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인도와 힌두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또 그 힌두교가 인도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가장 왕성한 꽃을 피웠을 그 힌두의 본고장에도 힌두문화의 많은 유산이 폐허화돼 방치된 곳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과거 대제국을 이뤄 엄청난 규모와 찬란한 문화를 말해주는 곳도 포함돼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대부분이 이민족의 침입이나 자연환경의 변화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에서 그것도 남인도에서 힌두문화의 거대한 폐허를 접한다는 것을 좀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힌두교도가 세운 대제국 비자야나가르
‘비자야나가르’는 함피 마을을 중심으로 1336년 ‘퉁가바드라’ 강변에 ‘텔루구’라는 군소 부족의 두 왕자 ‘하리하라’와 ‘부카’라는 힌두교도가 세운 왕국이다. 이때를 상가마 왕조라고 하는데 건국 후 얼마 되지 않아 인도 남부지방에서 가장 큰 제국이 됐다. 이것은 곧 북부에 있는 이슬람 국가들의 침략을 막는 방벽 역할을 함으로써 12~13세기 혼란과 분열을 겪은 힌두교도의 생활과 행정을 재건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비자야나가르인들은 이슬람교도를 개인적으로 배척하지 않았기 때문에 접촉을 통해 문물을 받아들였고, 이것은 새로운 사상과 풍부한 창조력의 바탕이 됐다. 나라를 통합하는 원동력으로서 산스크리트 사용이 장려됐고, 지방문학이 꽃을 피웠다. 이렇듯 국경 지역을 제외한 후방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의 평화와 번영이 지속됐다. 그 전성기 시절은 툴루바 왕조의 ‘크리슈나 데바 라야’의 재위 기간으로써 아라비아해에서 뱅골해까지, 데칸고원에서 인도반도의 끝까지를 다스렸다.
하지만 후계자 시대에 접어들면서 비자야나가르 제국에 대항하는 이슬람 세력이 연합하기 시작했고, 1565년 그 이슬람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 후 쇠퇴해진 국력을 수습하기는 했으나 명맥만 유지해오다가 1614년 내분과 이슬람 술탄들의 음모를 견디지 못하고 화려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오늘날 그 유산만이 함피 일대를 비롯해 남인도 각지에서 애잔한 모습으로 지난날을 얘기해주고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함피마을에서는 ‘산크라망’이라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곳은 온 사방에 커다란 바윗덩이들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다. 자연 환경이 남다른 곳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그 사이로 나 있는 길들을 따라 수많은 사람이 한곳으로 몰리고 있었다. 마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바자르(시장)가 있는 곳이다. 바자르의 끝이라고도 할 수 있고 처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에 높이 52m나 되는 거대한 힌두교식 탑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마치 비자야나가르 제국 당시의 영광을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수많은 조각으로 뒤엉킨 이 탑을 ‘고푸람’이라고 하는데 남인도 일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고푸람은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서 그 밑으로 나 있는 문을 통해 사람들이 드나들게 돼 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바자르에서 신에게 바칠 예물 즉, 섬유질을 벗겨낸 야자, 바나나, 꽃 등을 담은 조그마한 바구니를 하나씩 사든 순례자들이 고푸람을 통해 ‘비루팍샤’ 사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돌기둥 만지면 음악이 연주되는 비탈라 신전
그들은 신 앞에 이르러 준비해온 야자를 그 자리에서 내리쳐서 쪼갠다. 그 야자 물을 자신의 머리에 바르기도 하고, 살짝 입에 적시기도 하다가 신에게 모두 부으면서 축복을 빈다. 신상(神像) 주변은 항상 야자 물로 흥건해 있다. 사원 내에서는 누구나 맨발로 다니기 때문에 사정을 잘 모르는 이방인이 볼 때는 대단히 지저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중앙 홀에 모셔진 신전에서는 신도들이 둘러서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한편에서는 사제가 신이 내린 불꽃을 받아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제가 불판을 들고나오니 모두 그 불꽃 근처에 손을 대면서 역시 뭔가를 중얼거린다. 원시적으로 비치기는 하지만 마치 ‘인디아나존스’ 영화의 한 장면을 대하고 있는 것 같은 신비감을 주기도 한다.
비자야나가르 유적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곳은 단연 퉁가바드라 강변에 있는 ‘비탈라’ 신전이다. 이곳에는 세 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두 개는 신전이고 중앙에 있는 것은 궁전이다.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이들은 그 기둥들에 머리는 용이고 몸은 사자인 기이한 동물이 조각돼 있는 것이 일품이다. 또 신전 마당에는 금방이라도 굴러갈 듯한 ‘돌마차(Stone Car)’라는 게 있는데 돌을 다루는 솜씨가 마치 나무를 다루는 듯해 석조 예술의 극치를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진정 놀라운 것은 중앙에 있는 궁전 건물이었다. 물론 그것은 조각의 섬세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음악 궁전’이라고 한다기에 처음에는 ‘이곳에서 악기를 켜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놀았는가 보지?’하고 평범하게 생각했는데 그렇게 평범한 게 아니었다. 먼저 이곳의 구조를 말하자면 중앙에 홀이 있고 그 둘레에 여러 개의 돌기둥이 있는데 그 각 기둥에는 또다시 여러 개의 작은 기둥이 마치 현악기의 현처럼 조각돼 있다. 또 각 기둥마다 인도 전통의 타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사람이 조각돼 있는데 이것은 모두 하나의 돌로 연결돼 있는 것이다. 그 외에는 사실 별것 없다. 그런데 여기서 관리인의 친절한 안내를 받고부터 놀라움은 시작됐다.
“자, 여기를 두드려 볼 테니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대고 들어보세요” 하면서 그 관리인이 손때가 묻은 작은 돌기둥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혹시나 하고 귀를 기울였는데 놀랍게도 그 돌기둥에서 어떤 울림이 들렸고 그 소리가 꽤 맑았다. 이뿐만 아니었다. 안내인은 계속 다른 기둥을 돌아가면서 두드렸는데 기둥마다 소리가 달랐고, 손가락의 놀림에 따라 음악이 연주돼 울려나왔다.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각 기둥에 조각돼 있는 타악기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면 실제 그 악기의 소리가 났다. 북을 치면 북소리가, 장구를 치면 장구 소리가 나는 식으로 서로 다른 소리가 울려나오는 것이다. 참 믿지 못할 일이었다. 돌기둥 속이 비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날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그 이치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제국 시절에 여러 악사가 실제 악기도 없이 이 기둥들을 두드리면서 음악을 연주하고, 중앙 홀에서는 그 음악에 맞춰 무녀들이 춤 추고 놀았지요. 이곳은 이 일대에 남아 있는 비자야나가르 유적 중에서 최고의 예술품일 뿐만 아니라 인디아에서 가장 귀중한 유물 중의 하나입니다. 또 유네스코의 세계 보존 문물로도 지정돼 있습니다. 그래서 보존상 누구나 함부로 두드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오늘 당신에게는 특별한 서비스를 한 것입니다.”
힌두와 이슬람이 합쳐진 다양한 건축물 이채
거친 광야에서 신전들을 기웃거리면서 순례의 발길은 이어진다. 언덕을 오르내리는 발길에 그늘 하나 없어 뜨겁고 팍팍하기만 하다. 순례자들은 성지를 순례함으로써 특별한 은혜를 받는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 정도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힌두인은 순례를 통해 죄악이나 오염으로부터 벗어나거나 종교적 공덕을 유지해 내세에서는 하늘에 태어나기를, 더 나아가 윤회에서 해탈하기를 바란다.
순례는 비단 사람들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닌 듯했다. 무엇을 알고 그러는지 몰라도 주인 없는 소 몇 마리가 무리를 지어 계속 그 순례의 길을 걷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이 땅에서만은 소가 사람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는 존재들인데 무엇이 부족해 더 많은 은혜를 입기를 바라는 것처럼.
꽤 먼 길을 걸었다. 수로를 건너고 바나나밭을 지나니 이번에는 좀 색다른 건축물이 다가섰다. 지도를 보니 ‘하자리 라마 사원(Hajari Rama Temple)’과 ‘연꽃 궁전(Lotus Mahal)’, 그리고 ‘여왕의 목욕탕(Queen’s Bath)’ 등이 표시돼 있었다. 모두가 왕궁터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석조 건축물이긴 마찬가지지만 힌두와 이슬람의 혼합 양식이었다. 그러니까 이슬람의 침공 이후 그 영향 아래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문명도 한 번 힌두 속으로 들어오면 그 힌두에 동화돼버린다고 하는데 이런 곳들이 그런 사례인 것 같다고나 할까.
몇 발자국 옮길 때마다 나타나는 것이 신전 아니면 궁전 등이다. 그 신전에 모셔져 있는 신들의 형태도 어떤 곳은 원숭이 모습을 한 ‘하누만’과 부와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해서 매우 인기가 높은 코끼리 모양의 ‘가네샤’ 등의 동물 모양의 형상들도 거대한 모습으로 모셔져 있다. 애니미즘을 비롯한 원시종교의 일면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 힌두교임을 깨닫게 한다.
이 많은 것이 거의가 버려진 상태로 있었다. 이곳을 성스럽게 생각한다면 지금 다시 고쳐서 사용한다 해도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은데 왜 그대로 방치해두는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은 비록 그 제국은 사라졌어도 신도들은 얼마든지 있는데 말이다. 모든 것은 자연에서 와서 다시 자연 그대로 돌아가게 두는 것이 이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 엄청난 돌기둥과 조각품들을 이뤄낸 공력이 아쉽기만 하다. 편견일지는 몰라도, 사실 근래에 와서 다른 곳곳에 지어 놓은 힌두사원들을 보면 예술적 감각 면에서 훨씬 뒤떨어져 보이기 때문에 그런 아쉬움이 더한다.
소달구지를 타고 원점으로 돌아와서 함피마을과 비루팍샤 사원이 잘 내려다보이는 헤마쿠타 언덕 위에 올랐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옅은 안개를 만들어내고 있다. 황포의 도티를 두른 한 힌두 사두가 석양빛에 잠겨 있다. 그가 어디에서 와서, 지금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또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살아야 되지 않을까? 당시의 비자야나가르인뿐만 아니라 지금의 인도인들을 이해하려면 힌두교에 대한 이해 없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다. 안개 속의 고푸람이 그 옛날 비자야나가르 제국의 세계로 빨려들게 한다.
함피(인도)=글·사진 박하선 여행작가 hotsunny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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