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이 혁신의 최대 敵…정권 지지층과도 과감히 맞서라"

입력 2018-10-10 17:33  

창간 54주년 - 혁신성장, 성공의 조건
(2) 규제혁파, 이번엔 제대로 하자



[ 조재길 기자 ] ‘규제개혁 전도사’를 자처한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올 들어서만 국회와 정부를 수차례 방문했다. 굳이 세자면 국회는 네 번, 정부는 열 번 이상 찾았다. 기업이 뛸 수 있게 규제를 제발 풀어달라는 호소를 하기 위해서다. 박 회장은 “상의 회장을 맡은 4년 남짓한 기간 정부에 제출한 게 23번, 각종 발표회에서 건의한 게 15번, 모두 합해 38차례 규제개혁 과제를 전달했다”며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규제개혁은 정권마다 ‘명운’을 걸고 추진해온 과제다. 규제혁파 없이는 신(新)산업·고용 창출은 고사하고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다. 하지만 실행은 다른 문제다. 규제개혁을 막는 갖가지 장벽은 도처에 널려 있고, 오히려 규제를 양산하는 공무원 집단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민화 KAIST 교수(전 벤처기업협회장)는 “규제와 혁신은 명백하게 반비례 관계”라며 “규제를 풀지 않고선 혁신성장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규제혁파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1. 기득권 '진입장벽'을 깨라

한번 생긴 규제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기득권의 저항 때문이다. 진입장벽이 낮아지면 시장 참여자가 늘면서 경쟁이 격화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규제개혁을 언급할 때마다 “가장 큰 적(敵)은 기득권의 저항”이라고 말했다.

수년째 바뀌지 않는 저비용항공사(LCC) 시장이 대표적이다. 항공기가 한 대 도입될 때마다 일자리가 최대 2600개 창출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금으로선 새 사업자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LCC 시장 진입규제로 오히려 대기업 계열 항공사들이 과점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다. ‘승차공유’(카풀) 같은 서비스는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는 데다 소비자 이익과 부합하는데도 택시업계 반발로 시도가 막혀 있다. 대표적 차량공유업체인 우버는 일찌감치 퇴출됐다. 정보기술(IT)업계 관계자는 “전 세계가 승차공유 모델을 허용하는 추세인데 우리만 목소리 큰 이익단체에 발목이 잡혀 있다”고 하소연했다.

2. 시민단체 벽을 넘어라

지난 6월27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 규제개혁 점검회의가 당일 오전에 돌연 취소됐다. 당초 은산분리(산업자본의 은행소유 제한)·개인정보보호 규제 완화 등을 논의할 예정이었지만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의 반대에 부딪힌 데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국회에서도 관련 논의가 이뤄질 때마다 진보 시민단체들은 “규제 완화가 공익적 가치를 침해할 우려가 크다”며 반발했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규제개혁에 가장 크게 반발하는 집단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군’으로 분류돼온 진보 시민단체다. 사회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들 시민단체의 벽을 넘지 못하면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처럼 개혁 과제들이 좌초할 위험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시민사회 진영에 오래 몸담았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마저 “진보진영의 개혁 조급증과 경직성 때문에 문재인 정부의 개혁이 실패할지 모른다”고 경고했을 정도다. 이병태 KAIST 경영대학 교수는 “요즘 행정부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만큼 힘이 없다”며 “정권을 잃을 수 있다는 각오로 지지층과도 맞서는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할 것”이라고 했다.

3. 원칙을 갖고 여론을 설득하라

‘투자개방형 병원’ 건립은 김대중 정부 때 처음 시도됐다. ‘경제자유구역법’을 제정해 근간을 마련했다. 이후 노무현 정부는 물론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의료 선진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투자개방형 병원을 추진했지만 매번 무산됐다. 이익단체 반발의 벽도 높았지만 무엇보다 여론전에서 패했던 게 주요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투자개방형 병원이 의료 기술과 서비스를 발전시켜 국민에게 더 나은 혜택을 준다는 논리를 적극 내세워 여론을 설득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영리병원’이나 ‘의료 민영화’라는 이익단체 논리에 휘말려 정부가 먼저 두 손을 들었다”고 지적했다.

4. 가능한 대안부터 실행하라

지난달 말 우여곡절 끝에 국회 문턱을 넘은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선 사안에 대한 ‘모범 답안’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과거 16년간 흔들리지 않던 은산분리 규제 완화의 첫 단추를 끼웠다는 점에서다. 산업자본의 인터넷은행 지분 한도는 종전 4%에서 34%로 높아지게 됐다.

그동안 은산분리 완화를 놓고 ‘핀테크(금융기술) 및 금리·수수료 경쟁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찬성론자와 ‘은행이 산업자본의 사금고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반대론자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다 대주주 대출 금지, 대주주 보유기업에 대한 지분취득 제한 등 절충안이 나왔다. 한국경제연구원 관계자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중국 알리바바와 같은 세계적인 핀테크 기업을 배출할 수 있는 첫걸음은 뗀 셈”이라며 “일반은행의 규제 완화도 차츰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5. 부처 칸막이(silo)를 없애라

국무조정실 부패척결추진단이 작년 초 ‘공무원 규제개혁 저해 행태’를 점검한 결과 무사안일한 일처리 등이 210건 적발됐다. 규제 남용 및 타 부처 떠넘기기도 적지 않았다. 복합의료부지에 체육시설 허가를 내줬다가 취소해 기업에 2억4000만원의 손실을 입힌 사례도 있었다.

공무원들이 보신주의에 빠져 관련법을 엄격하게 ‘해석’만 하는 관행이 여전하다. 하나의 신산업을 놓고 부처끼리 서로 자기 영역이라고 다투는 탓에 규제가 더 꼬이는 사례도 많다. “공무원이야말로 규제의 공범”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규제를 쥐고 있는 공무원이 움직이지 않으면 혁신성장과 일자리 창출도 요원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경고다. 국무조정실 민관합동규제개선추진단 관계자는 “국회에서 통과된 정보통신융합법 개정안 등 규제 샌드박스법의 경우 민원인 질의 후 30일 안에 회신하지 않으면 규제가 없는 걸로 간주하는 내용이 포함됐다”며 “기업들이 공무원의 무사안일주의 등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란 점에서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라고 소개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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