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확고한 철학과 꾸준한 투자 배워야
송형석 IT과학부 차장
[ 송형석 기자 ] 국내 과학계 인사들은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10월만 되면 고개를 들지 못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2015년 기준 1.21%)은 세계 1위면서도 노벨 과학상과 인연이 없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웃나라 일본이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기라도 하면 과학계를 향한 비난의 강도가 한층 더 세진다.
올해도 똑같았다. 이달 초 혼조 다스쿠 일본 교토대 의대 교수가 올해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22 대 0’이란 제목의 논평이 쏟아졌다. 일본과 한국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 숫자가 국가 경쟁력의 현주소를 보여준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여러 산업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한국이 노벨 과학상과 인연이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노벨 과학상 수상자 배출 여부에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조적인 지적만으로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한국연구재단은 지난달 30일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노벨 과학상 콤플렉스’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과학기술 수준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다 보니 노벨 과학상이라는 외부적 인정을 한층 더 강하게 갈구한다는 논리였다.
과학계 일각에선 ‘걸음마를 하는 아이에게 달리기를 강요하는 격’이란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이 현대적인 연구설비를 갖추고 기초과학 연구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 20여 년 전이다. 기초과학 역사가 100~200년에 달하는 미국이나 유럽의 연구자들을 따라잡기엔 짧은 기간이다.
R&D 예산은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는 수준의 연구 성과가 나올 조건 중 하나에 불과하다. 과학 분야 교육철학이 자리를 잡아야 하고 과학자를 길러내는 시스템도 갖춰야 한다. 이런 무형의 조건들을 갖추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일본만 해도 70~80년간 기초과학에 매진해 2000년 이후부터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일본인 노벨 과학상 수상자 22명 중 16명이 2000년 이후에 상을 받았다.
진짜 문제는 노벨상 콤플렉스가 국내 과학계의 여건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노벨상 수상 불발 소식이 전해진 직후엔 ‘국가 R&D 정책을 기초과학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 ‘20~30년이 걸리는 장기 연구에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만 이런 분위기가 오래가지 않는다.
국정감사 등에서 국가 R&D 예산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면 R&D 프로젝트의 단기 성과를 계량화하는 쪽으로 정책 기조가 되돌아간다. 장기 프로젝트가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일본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기초과학에 대한 한결같은 자세다. 2012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야마나카 신야는 1997년부터 2012년까지 국가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이화학연구소 연구진이 2016년 발견한 113번째 원소(니호니움·Nh) 연구 역시 20년 이상 장기 프로젝트 결과물이다.
‘대를 이은’ 연구도 적지 않다. 200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고시바 마사토시 도쿄대 명예교수와 201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가지마 다카아키 도쿄대 교수는 중성자 연구를 위한 연구시설 가미오칸데에서 사제의 연을 맺었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기초과학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꾸준한 투자다. 왜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느냐는 질타는 10~20년 후에 해도 늦지 않다.
click@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