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병연 기자 ] 1980년대 미국 자본시장은 ‘약탈의 시대’로 기록돼 있다. 1970년대 사회운동의 일부로 시작된 주주 행동주의가 투기자본의 단기차익 전략으로 활용되면서다. 1980년대 초 매년 발생한 100여 건의 인수합병(M&A) 거래 중 적대적 M&A가 30%에 달할 정도로 기업 입장에선 수난의 시기였다. 행동주의로 무장한 헤지펀드들은 인수한 회사 가치를 단기간에 끌어올리기 위해 기업 분할·매각, 대량 해고 등을 무차별적으로 단행했다. 칼 아이칸, 제임스 골드스미스 등이 ’기업 사냥꾼’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들 헤지펀드에 ‘탐욕의 약탈자’ ‘벌처(vulture·대머리독수리) 펀드’라는 악명이 붙은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이런 약탈적 행동주의는 미국 기업들에 포이즌 필, 황금낙하산 등 경영권 방어 장치가 도입되면서 점차 힘을 잃어갔다.
구세주로 위장한 투기자본
한동안 잠행하던 행동주의 펀드는 2000년대 들어 다시 맹위를 떨친다. ‘늑대 무리(wolf pack) 전략’을 들고나오면서다. 이들은 기업들의 시가총액이 높아져 5% 이상 대주주 지분을 확보하기 어려워지자 소수 지분으로 무리를 지어 공략하는 기법을 활용했다. 이를 통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보고 의무를 피하고 적은 자본으로 글로벌 기업들에 대한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다.
행동주의 펀드들은 ‘주주들의 구세주’를 자처한다. 하지만 세력을 키우기 위한 위장 전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세 차익을 노려 펀드 수익률을 올리는 헤지펀드 속성상 기업의 장기적인 지속과 성장에는 관심이 없다. 헤지펀드는 기업 주주가 아니라 펀드 투자자에게 돈을 벌어주는 걸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캐나다 지배구조 전문 연구기관인 IGOPP가 2015년 발간한 ‘행동주의 헤지펀드 연구: 경험적 증거’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헤지펀드 공격을 받은 기업 115개 가운데 2014년까지 살아남은 기업은 63개에 그쳤다. 절반에 가까운 52개사는 부도·청산 절차를 밟거나 펀드 등에 팔렸다. 이들 기업이 헤지펀드 요구를 수용해 배당을 늘리고 핵심 자산을 매각하면서 성장 동력이 손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어떡하나
금융위원회가 국내 사모펀드(PEF)도 해외 헤지펀드처럼 소수 지분만으로 대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로 했다. PEF가 의결권이 있는 주식 10% 이상을 취득해야 하는 규제를 풀어주는 방식을 통해서다. 현대자동차 지분 1.4%를 보유한 채 자사주 소각 등을 요구하며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을 뒤흔든 미국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처럼 국내 PEF도 소규모 투자로 기업 경영에 간섭할 수 있게 된다. ‘한국판 엘리엇’이 대거 등장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문제는 차등의결권과 포이즌 필 등 세계 주요국에서 보편화된 경영권 방어 수단이 국내 기업들엔 없다는 점이다. 기업들은 해외 헤지펀드에 더해 토종 PEF들의 칼을 방패 없이 막아내야 하는 처지에 몰리고 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국내 PEF가 해외 펀드에 비해 역차별받는 측면이 있다”며 “PEF 제도 개편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진짜 기울어져 있는 건 “외부 투기세력 공격을 방패 없이 막아야 하는 기업 환경”이라는 경영계의 목소리도 나온다.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간판 기업들이 엘리엇 같은 투기자본에 휘둘리는 것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당국이 한국 특유의 반(反)기업정서에 편승해 수수방관하다간 한국 자본시장에 1980년대 미국의 기업 약탈 시대가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기우만은 아니다.
yoob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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