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민지혜 생활경제부 기자)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는 명품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다른 브랜드보다 가격도 비싼 데다 ‘수작업’을 고집하며 희소성 마케팅(hunger marketing)을 펴고 있다. 특히 영국 배우 겸 가수 제인 버킨의 이름을 딴 ‘버킨’ 핸드백과 모나코 왕비가 된 미국 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이름을 딴 ‘켈리’ 핸드백은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명품백’이다. 국내 판매가격이 최소 1500만원, 비싼 가죽은 3000만~4000만원에 달하는데도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서 있다.
하지만 국내 매장엔 가방이 아예 들어오질 않는다. 최고급 가죽을 정교하게 염색해 사람이 일일이 바느질하는 등 공정이 까다로워 생산량이 판매량을 못 따라온다는 게 에르메스 측의 설명이다. 하지만 명품업계에선 “일부러 덜 만들어 희소 가치를 올리려는 게 에르메스의 전략”이라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인기 색상인 블랙, 에토프(회색빛 베이지), 카멜 같은 색상은 몇 백만원의 ‘웃돈’을 붙여 되파는 일이 허다하다. 여행객들이 파리에만 가면 에르메스 제품을 사오는 이유다.
지난 9월 25일부터 이달 3일까지 열린 파리패션위크 취재차 파리에 방문했을 때, 에르메스의 ‘온라인 예약제’를 직접 이용해봤다. 어느 나라에서도, 브랜드에서도 시행하지 않는 독특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에르메스는 지난해 말부터 파리 생토노레 본점에서만 온라인 예약제를 통해 가죽 가방을 판매하고 있다.
기존에는 매장 앞에 줄을 서게 했지만 전날 밤부터 노숙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급증하자 사전 예약제로 바꾼 것이다. 방문하고 싶은 날 하루 전 10시30분부터 저녁 6시30분 사이에 웹사이트에 여권번호, 이름, 연락처 등의 개인정보를 적고 휴대폰 번호로 본인인증을 하면 신청이 완료된다. 그날 저녁 7시30분에 예약이 됐는지 여부를 문자, 이메일로 알려준다. 예약이 바로 되는 일은 없다. 파리에 거주하는 한인 유학생들에 따르면 △처음 시도하는 사람은 3~4일 안에 가능하고 △이때 방문하지 않거나 아무 것도 사지 않으면 향후 2주 동안 예약이 불가하며 △에르메스 구매내역이 있는 사람은 확률이 높다는 게 암암리에 통용되는 원칙이다.
지난 9월 말 세 차례의 시도 끝에 예약이 됐다. “고객님의 예약이 확인되었습니다 0월 0일 0시, 생토노레 부티크에서 고객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는 알람이 왔다. 오후 시간이었다. 오전에 가야 그나마 가방을 한 두개라도 살 수 있다고 들었던 터라 걱정이 됐다.
파리 현지 유학생들이 이용하는 정보 공유 사이트를 통해 구매대행 업체를 찾았다. 유학생들이 자주 이용한다는 ‘구매대행 알바’가 어떤 방식인지 궁금했다. “에르메스 방문 예약 성공했는데 가방 구입 알바를 할 수 있을까요”라고 카카오톡으로 업체 사장에게 묻자 “처음이신가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하자 “가방 사양을 다 불러줘야 하니까 저희 바이어랑 같이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버킨이라고 다 같은 버킨이 아니고 사이즈, 가죽 종류, 색상, 스티치와 장식의 색상 등 자세한 사양을 정확히 얘기해야 해당 제품을 보여준다는 얘기였다.
다음날 아침 문을 여는 10시30분에 에르메스 본점에서 구매대행업체 직원인 한국인 바이어와 만났다. 내 여권과 예약자명을 보여준 뒤 셀러(전담 판매원)를 배정받았다. 오후 예약이었지만 함께 간 직원은 “오후에 기차 예약이 있어 지금 사고 싶다”는 방법을 썼다. 통했다.
그런데 웬걸, 동양인들에게 제일 가방을 안 보여준다는 중국인 여성 셀러가 배정됐다. 원하는 사양을 묻자 그 직원은 “버킨 25나 30 사이즈로 아무 가죽이나 블랙이나 뉴트럴 색상에 금장 하드웨어로, 켈리 28사이즈 어두운 계열 색상에 금장이나 은장 하드웨어로 보고싶다”고 했다. 또 한국인 사이에서 인기가 좋은 가든파티, 에르백도 아무 색이나 보여달라고 했다. 알겠다며 셀러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자 매장 안엔 우리처럼 가방을 기다리는 중국인 커플, 프랑스인 모녀, 히잡을 쓴 중동계 여성 등 다양한 사람들이 서 있었다.
20여분이 흘렀을까. 중국인 셀러는 “버킨 켈리는 아예 없다”며 주황색 박스 2개를 가져왔다. 빨간색 가든파티 30 사이즈, 블랙에 네이비로 포인트를 넣은 에르백 31 사이즈였다. 그 직원은 재빨리 사진을 찍어 구매대행업체 사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채팅이 오갔고 다른 색상, 사이즈를 셀러에게 물어본 뒤 없다고 하자 결국 2개 가방을 다 사겠다고 했다. 가든파티는 2440유로, 에르백은 1800유로였다. 총 4240유로를 그녀는 현금으로 냈다. 약 560만원에 달하는 돈을 유로로 건네자 카운터의 직원은 늘상 보는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돈을 셌다.
결제가 끝난 뒤 매장 밖으로 나온 그녀는 ‘알바비’라며 100유로를 건넸다. “에르메스는 예약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알바비가 쏠쏠한 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날 구입한 가방의 가격과 희소성, 갯수 등에 따라 알바비는 최소 50유로에서 최대 500유로까지 지급한다고 했다. 그 구매대행업체 사장은 내게 “앞으로 또 파리 올 땐 미리 일정을 알려주면 바이어와 시간을 맞춰놓겠다”며 “오늘 수고했다”고 말했다.
그날 만약 외국인 셀러가 배정됐다면, 그가 만약 기분이 좋아서 버킨과 켈리를 보여줬다면 ‘시크릿 룸’(비밀의 방)에 들어갈 수 있었을 터였다. 에르메스는 버킨, 켈리 같은 비싼 가방을 보여줄 때만 비밀의 방으로 손님을 부른다. 그 외의 제품은 그냥 매장 안에 선 채로 보여준다. 인터넷에는 ‘버킨 구입 성공기’ ‘켈리 구입 노하우’ 같은 블로그 글이 종종 올라온다. 이 정보에 따르면 △에르메스 제품 등 비싼 옷, 가방을 착용하고 방문해야 하며 △외국인 셀러를 배정받아야 버킨, 켈리를 보여줄 확률이 높고 △남자와 동행하면 실구매자로 판단해 비싼 가방을 보여줄 가능성이 크며 △한 번 보여준 제품을 사지 않겠다고 하면 도로 가져가서 다시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애당초 버킨은 구경도 못 할 일이었다.
프랑스 유학생 정보공유 사이트에는 지금도 “에르메스 샤넬 루이비통 고야드 등 명품백 바이어 구합니다” “프렝탕백화점 쇼핑도움 30분에 30유로+@ 알바 구합니다”라는 글이 여럿 올라와있다. 버킨, 켈리 가방은 프랑스에서 보통 7300~9300유로(약 950만~1200만원)대다.
국내에선 2000만원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데다 온라인 중고장터에서도 최소 1500만원대에 거래되는 것을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싼 것이다. 게다가 ‘에르메스 재테크’도 한몫 한다. 올해 6월 영국 런던 크리스티경매에선 에르메스의 악어가죽으로 만든 ‘2008년 히말라야 버킨백’이 16만2500파운드(약 2억340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한 프랑스 유학생은 “1000만원을 주고 파리에서 산 에르메스 가방은 한국인에게 2000만원에 팔 수 있기 때문에 알바를 고용하면서까지 가방을 사는 구매대행업체가 많다”고 전했다. (끝) / spop@hankyung.com
관련뉴스